서 일 환   
 서호면 산골정마을生
​​​​​​ 전 광주우리들병원 행정원장
​ 첨단재활요양병원 행정원장

국민학교에서 학년이 올라가면 환경조사를 하였고 가정방문을 하였다. 자택인지 전세인지 월세인지 파악하고 다시 자동차, 피아노, TV, 냉장고, 전화 등을 확인했다. 자동차와 피아노는 꿈속의 이야기였고 겨우 TV와 냉장고가 있었다. 전화는 동네마다 첫 집이나 이장집에 한 대씩 설치하여 서울에서 전화가 오면 동네방송을 하여 전화를 받게 하였다.

우리 집은 모개잿등 아래 첫 집이라 공동 전화가 설치됐다. 그래서 전화를 받으라는 동네방송을 하곤 하였다. 

국민학교 때는 담임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하면 오전 수업만 하고 귀가 한다. 학부모들은 계란 열 개를 짚으로 묶어서 주기도 하였다. 부잣집에서는 씨암탉 한 마리를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다수는 씨암탉은커녕 계란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세 개의 국민학교 졸업생들이 하나의 중학교로 모였다. 산골정은 중학교까지 5리라서 반 시간이면 걸어갈 수 있었다. 성재리는 십리라서 한 시간 걸렸고 태백은 이십리라서 두 시간 걸렸다. 결국 여자들은 버스를 탔지만 남자들은 자전거를 탔다. 

중학교에 입학하자 사범대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발령받은 신규 여선생님이 오셔서 학교 옆에서 하숙을 하였다. 국민학교 때처럼 환경조사도 하고 가정방문도 하였다. 처음에는 학교 근처를 하였으나 다음날에는 점점 먼 동네로 가게 되었다. 

가정방문보다 힘든 것은 어른들도 해가 지면 건너기 어려운 산길을 하숙집으로 걸어서 돌아가는 것이다. 당시에는 하루에 네 번 왕복하는 버스도 끊어져 버렸고 자가용은커녕 오토바이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 선생이라 자전거도 타지 못했다. 물론 자전거를 탄다고 해도 비포장 된 신작로를 밤에 타고 다닐 수는 없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섬으로 발령받은 여선생들은 섬마을 총각들과 어쩔 수 없이 결혼하는 사례가 많아 발길 조심하라는 선배들의 교육이 많았다고 한다. 

다음날부터 선생님을 따라 가정방문을 동행했고 가정방문이 끝나면 선생님 하숙집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등교했다. 일주일 동안 가정 방문이 계속됐다. 가정 방문이 끝나는 날, 허전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아카시아 향기를 맡으며 다녔던 가정방문이 아련하게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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