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의병사(20)-■ 호남 의병의 선봉, ‘영암 의병’
영암의병과 심남일 의병이 결성한 ‘湖南義所’

함평군 월야면에서 태어나 서당 훈장이었던 심남일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호남창의회맹소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본명은 심수택. ‘전남 제일의 의병장’이라는 의미로 남일(南一)이라는 이름을 썼다. 사진은 심남일 의병장의 생전 모습.

박평남 등이 호남창의소를 결성하여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을 때, 함평 출신 심남일이 의병부대를 이끌고 영암으로 왔다. 심남일은 영광 출신 전해산, 보성 출신 안규홍과 함께 일제가 ‘거괴’(巨魁)라고 부를 정도로 뛰어난 활동을 하였다. 그는 주로 영암을 중심으로 나주·남평·강진·보성·강진·해남 등 전남의 중남부 지역을 장악하여 일제와 의병 전쟁을 일으켰다.

심남일은 함평 월야 출신으로, 본명은 심수택이다. 남일(南一)은 ‘전남 제일의 의병장’이라는 뜻으로 본인 스스로 사용한 호다. 1906년 향리에서 서당 훈장과 향교의 교임을 맡을 정도로 학식이 풍부하였던 그는 “의병은 아침에 적을 치고 저녁에 조국의 산에 묻히는 것”이라고 ‘의병’을 정의할 정도로 의병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남일은 항상 분개하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위태로운 국가를 위해 순국하려 하였다. 마침내 ①을사늑약 이후에 이르러 종사의 위태로움을 보며 통분하고 간사한 적의 어리석은 농간에 분개하여 장차 창의하여 국권을 되찾고자 하였다.(중략) 그러나 ②응모자가 거의 없었다.”라고 하는 데서, 을사늑약이 의병을 일으킨 동기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광주광역시 남구 광주공원에 있는 심남일 의병장의 순절비.

그러나 ‘응모자가 거의 없었다’라고 하는 데서 실제 따르는 사람이 없어 의병을 일으키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최익현처럼 명망이 있는 유생도 아니고, 재력이 튼튼한 부호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일단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의 신문조서에 “일본을 한국에서 구축하고자 융희 원년(1907) 9월에서 12월까지 기삼연, 김태원·김율 등 수괴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장성·영광·함평 각 군을 돌아다녔다”라고 하는 데서 그가 기삼연·김태원·김율 휘하에서 약 넉 달간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가지고 심남일이 기삼연이 조직한 ‘호남창의회맹소’의 일원이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약간 망설여진다.

심남일이 유생이면서도 다른 유생 출신 의병들처럼 유생들과의 구체적인 연결 관계가 거의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넉 달 동안 ‘호남창의회맹소’에서 활동하였다 하더라도,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 하겠다. 그는 학연이나 지연으로 볼 때도 기삼연 의병부대에 가담했던 다른 유생들과 관련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를 ‘호남창의회맹소’의 핵심인물로 파악하는 데 주저하게 된다.

이러한 의심을 하는 또 다른 근거로 심남일이 여러 차례 혁혁한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기삼연이 저술한 ‘성제기선생거의록약초(省齋奇先生擧義錄略招)’ 권3에 실린 호남의병장 열전에 누락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심남일이 본인 또한, 기삼연 계열 의병장들보다 안규홍 등 다른 계열 의병부대와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추정을 하게 하는 근거라 하겠다.

심남일이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한 것은 기삼연 체포(1908.2.2.), 김율 체포(1908.3.29.), 김준 전사(1908.4.25.) 등과 관계가 있다. 즉, 일본 측 기록에 “심남일은 원래 거괴 김율의 부장으로 김의 사후 독립하여 수괴가 되어 부하 200명을 갖고 우세한 거괴가 되었다”라고 하는 데서, 그가 김율이 전사하자 별도로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심남일은 애초부터 기삼연 부대에 가입하려는 의사가 강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된, “별도로 의진을 결성할 생각을 처음부터 가졌지만 여의치 않았다”라고 하는 구절에서, 별도의 의병부대를 구성할 의지가 강했음을 살필 수 있다. 기삼연 의병부대에 들어갈 때도 그 의병부대가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살펴보기 위함이었다고 하는 데서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구성할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다고 여겨진다. 결국, 김율 의병부대에 속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정황은 심남일이 기삼연의 의병부대에 몸담고 있을 1907년 (음)11월에 남평 출신 김제현과 손잡고, 제현의 고향인 운곡에 창의소와 모의청(募義廳)을 세우려는 계획을 실천하려 했다는 데서 더욱 짐작할 수 있다. 김제현이 남긴 ‘南湖纂錄’에 따르면 이때 남평·함평·보성·나주·영암 등지에서 의사들이 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심남일이 김율 의병부대에 계속 잔류한 것으로 보아, 남평 거의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다 김율이 체포되고 김준이 전사하는 등 김준 형제 의병부대가 무너지자 흩어진 의병을 토대로 다른 지역의 의병들을 보태어 새로운 의병부대를 조직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1908년 (음) 2월부터 뜻을 세우고 함평·남평·보성·장흥 각 군에서 1~2명씩 부하를 모집하였다”는 데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그가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세웠다면 아무리 빨라야 (음) 3월 무렵이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이때 심남일이 의병부대를 결성한 곳이 어딜까? 홍영기 교수는 이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을 하지 않았으나, 또 다른 의병 연구자인 홍순권은 남평에서 심남일이 거의를 하였다고 파악하였다. 그가 심남일이 남평에서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고 판단한 것은, 남평에서 김제현 등과 거의를 구상하였다는 점과 ‘심남일 실기’ 때문이다. ‘실기’의 접전일기에 1908년 (음) 2월 13일 함평 신광에서 남평으로 진군하였다가 3월 7일 강진 오치동에서 일본군과 첫 전투를 치르고, 4월 15일 장흥 곽암, 6월 19일 남평 장담원, 6월 25일 능주 노구두에서 전투를 치른 후 7월 30일에 영암 사천 곧 시종 내동에서 큰 전투를 한 것으로 나와 있다. 곧 함평 신광에서 남평으로 진군한 것으로 나와 있다. 혹자는 심남일이 영암에 들어온 것은 7월 30일 국사봉이 있는 영암 금정 사촌에서 전투를 치른 후 비로소 금정 양방매 집에서 유숙할 때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심남일이 고향인 함평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할 때, 모병의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남평 등 다른 곳을 다니며 모병 및 의병부대 결성문제를 타진하였다. 남평 역시 바로 직전인 1907년 11월 방문하였을 때 이미 여의치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심남일이 의병부대를 옮기려 했을 때는 당연히 그에 맞는 조건 곧 의병부대를 결성하기가 편리한 곳이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심남일은 당시 영암 상황을 주목하였을 법하다. <계속>

박해현(초당대 겸임교수)·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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