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39>마한 남부 연맹체의 리더 ‘침미다례’ 재론(下)

해남반도에 자리 잡은 침미다례는 마한 남부연맹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해남반도의 거대한 고분군과 군곡리 패총의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은 시종 내동리 쌍무덤과 신촌리 9호분 금동관.

지난 호에 해남반도에 자리 잡은 침미다례가 마한 남부연맹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었다는 언급이 있었다. 그것은 진서에 나와 있는 마한의 신미 등 여러 나라가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고 하는 내용에서 알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해남반도에 있는 거대한 고분군의 존재 및 군곡리 패총의 유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고 살폈다.

그런데 기원후 369년 그러니까 근초고왕 24년에 백제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면서 마한이 완전히 백제에 복속되었다고 1950년대 말 이병도가 주장한 이래 적지 않은 문헌학자들이 동의하고 지금도 교과서에 정설로 남아 있다. 이에 대해 필자가 누차 이야기하였지만, 고고학적으로 6세기 중엽까지도 마한의 독자적 문화요소가 영산강 유역에 그대로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양직공도 백제국사 방소국에 마한왕국 이름이 보여 4세기 후반 마한 병합설이 사실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그럼에도 우리 지역 역사학자들조차 4세기 후반 마한 병합설을 아직도 신뢰하고 있어 적이 우려스럽다.

최근 필자와 같이 재직하고 있는 초당대 신정훈 교수는 침미다례와 백제의 관계를 당시 국제 정세와 관련하여 이해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평소에도 마한 역사에 대해 얘기를 자주 나누며 필자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 신 교수의 관점은 기존의 접근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어 살펴보고자 한다.
 
서남해안 진출에 제한을 받았던 백제

필자도 이미 몇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마한과 백제의 관계를 다룰 때는 이들 두 국가 외에도 가야·왜·고구려와의 관계도 함께 살펴야 한다. 이를테면 필자가 살핀 대로 6세기 중엽까지 영산강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서남부에 마한의 세력이 강대하게 버티고 있었다면 백제는 기존에 있던 서남해로 즉, 낙랑-서해안-남해안-김해-쓰시마섬-왜로 이어지는 해로를 이용한 직접 통교는 불가능하게 된다. 그것이 백제가 내륙을 통한 진출, 즉 마한과 가야의 변경에 속한 섬진강을 거쳐 경상도 남해안을 우회하는 새로운 루트를 개발하려 한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백제가 침미다례 등 영산강 유역의 마한 세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외교적으로 고립돼 있었다
한편 366년 근초고왕 21년, 368년 동왕 23년 두 차례에 걸쳐 백제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있다. 다음을 살펴보자.

 
  ① 3월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에 예를 갖추어 빙문(聘問)하였다.
  ② 신라에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주었다.

 
위 내용은 백제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있지만, 신라는 이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신라는 고구려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구려와 신라가 백제를 견제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양국이 백제를 견제하였던 것은 백제가 목지국을 멸하고 마한의 맹주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342년 고국원왕 때 중국 전연에 패하면서 요동으로 진출이 차단되면서 남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고구려와 대방을 무너뜨리고 북상 중인 백제와의 일전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같은 삼한연맹체로 경쟁의식이 강한 신라 역시 백제의 팽창을 우려스럽게 보고 있었다. 백제를 견제하려는 데 신라와 고구려의 인식이 서로 일치한 셈이다. 이러한 양국의 관계는 4세가 말 내물왕 때 신라가 가야와 왜 연합군의 공격을 받자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게 된 배경이다.

침미다례 역시 마한의 새로운 맹주로 들어서는 백제에 대한 견제에 적극적으로 나섰을 법하다. 특히 침미다례는 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어 백제의 대왜 진출을 견제하는 데 가장 유효한 왕국이었다. 백제가 침미다례를 ‘남만(南蠻)’이라 하여 비칭을 사용한 것은 양국 관계가 매우 불편함을 말해주고 있다. 즉, 백제의 입장에서 침미다례가 그들의 국익에 충실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침미다례와 고구려는 동맹 관계

고구려, 신라, 침미다례 등 마한 남부 세력으로부터 철저히 견제를 받았던 백제로서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이들 가운데 가장 세력이 약하면서도 왜와 연결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할 수 있는 침미다례 공격을 백제는 공격의 우선순위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밀접한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던 고구려가 침미다례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신정훈 교수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신 교수의 주장을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한다. 백제와 왜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침미다례는 인근 도서로 후퇴하면서 세력을 유지하였다고 살핀 신 교수는 침미다례와 백제의 전투가 있었던 369년 3월에 이어 벌어진 9월, 고구려와 백제의 치열한 전투에 주목하였다. 즉, 9월 전투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무려 2만여 이상의 군대를 동원하였기 때문에 백제 역시 그에 상당하는 군대를 동원하였을 법하다. 그러므로 백제는 침미다례를 계속 압박할 처지가 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의 공격으로 섬 지역으로 잠시 후퇴한 침미다례 세력이 곧장 세력을 회복하였다는 것이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백제를 압박했던 고구려

실제, 백제와 왜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침미다례는 쉽게 붕괴되지 않았다. 백제가 이 전투에서 침미다례를 ‘도륙(屠戮)’을 했다는 표현을 썼다. ‘도’란 짐승을 잡는다는 뜻이다. 백제가 이러한 표현을 침미다례에게 썼다는 것은 침미다례의 저항이 그만큼 치열함을 말해준다. 곧 침미다례를 쉽게 굴복시키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더구나 침미다례 공격 이후에 이어진 고구려와의 대규모 전쟁은 침미다례를 포함한 마한 남부 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경략을 하지 못하게 하였을 법하다.

369년 9월에 있었던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대규모 공격은 침미다례를 공격한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보복 전쟁 성격도 있지만, 백제가 침미다례에 집중한 틈을 타서 고구려가 백제를 압박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침미다례를 포함하여 마한 남부연맹은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확보하며 보다 강력한 연맹체를 건설하였을 법하다.

백제는 왜와 연합전선을 펴면서 시도한 마한 정벌은 성공하지 못한 채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투에서 사살하는 전과를 냈지만 오히려 고구려의 강한 반발만 불러일으켰다. 고구려는 백제를 치기 위해 모든 국력을 쏟아부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치열한 경쟁과 전쟁이 전남 해안에 위치한 침미다례의 생존을 보장하는 데 주요한 배경이 된 셈이다. 이러한 추론이 가능하다면 침미다례가 369년 이후에도 여전히 해남반도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또 다른 근거를 확보한 셈이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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