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봉 이어진 능선 또렷하게 보였을 석탑
정유재란 왜군의 호남 침공으로 파괴 추측

월출산 달구봉 황치산등 3층석탑이 있던 자리에는 파묘한 듯한 묘가 자리잡고 있고 나머지 구조물들은 주변에 무너져 어수선하게 나뒹굴고 있다.

■ 영암학연구회 달구봉 황치산등 석탑지 탐사

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 월출산 끝자락 달구봉에서 이어진 황치산등에 세워져, 나주와 강진에서도 보였을 거대한 3층석탑은 왜 나무들 사이로 쓰러졌을까. 역사의 파편들은 영암학연구회원에게 많은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영암문화원 영암학연구회(회장 최문수)와 월출산국립공원사무소(소장 김은창)는 6월 15일 오전 강진 성전면 월남리 월출산 자생식물원에서 출발해 정약용 유배길을 거쳐 지금은 폐쇄된 등산로를 따라 해발 550m 월출산 달구봉 황치산등을 공동으로 답사했다. 영암학연구회 최문수 회장과 회원 11명, 김인창 문화원 사무국장과 최은희 실장, 월출산사무소 자원보전과 백효선 외 1인의 직원이 함께 동행했다.

이곳은 2013년 영암문화원과 월출산국립공원사무소가 공동으로 합동조사팀을 꾸려 월출산에 존재하는 비지정 문화자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2014년 5월 높이 6m, 기단 넓이 3m의 거대한 삼층 석탑과 귀부석등(추정)을 발견한 능선이다.

영암학연구회는 그동안 조명되지 않고 있던 원래 탑이 위치한 곳의 파묘를 한 흔적이 남은 묘 1구와 제단, 그 앞 묘의 주인에 대한 기록을 남긴 비석의 내용을 조사했다. 앞면에 1800년대 살았던 금강거사 해주 최현의 묘, 뒷면에는 묘지를 조성한 그의 아들의 이름이 남아 있어 묘비의 주인공을 해주최씨 경오(1990년) 대동보에서 찾아냈다.

족보를 조사한 최경호 회원은 “묘 주인은 해주최씨 현감공파로, 주로 장흥에 연고가 있는 가계로 보이고 모친이 해주오씨인 것으로 봐서 외가가 영암일 것으로 추측된다”면서 “아들 유석은 ‘장흥지’에 실려있을 정도로 효심이 지극하다 보니 탑이 서 있던 능선 명당에 부친을 모신 듯하다”고 밝혔다. 이로써 탑이 훼철된 사연이 밝혀질 듯 했지만 묘의 주인이 거사라는 불교도를 지칭하는 기록을 비에 새겨놓은 것으로 볼 때 가능성이 낮을 것으로 봤다.

영암학연구회원들이 통일신라시대 양식으로 조각된 머리가 잘린 귀부석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창오 회원은 “아직 통일신라의 양식이 살아있는 귀부석등을 볼 때 고려초에 건국 공신이 나온 호남, 특히 도선국사와 최지몽 등의 영향력 아래 월출산에 비보사상을 구현하고 고려 건국과 그 영광을 후세에 전하면서 불심을 키우기 위한 거대한 불사를 통해 세워진 것으로 그 규모가 먼 지역에서도 관망이 가능할 정도로 크고 잘 관리가 됐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파괴된 기록이 없고 구전되는 사연도 없어 우리 지역에서 모를 정도이기 때문에 비교적 오래된 정유재란 때 칠천량 해전 참패 이후 호남이 뚫리고 왜군이 침입하면서, 왜병들이 월출산의 사찰과 탑들을 불태우거나 파괴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이 시기에 3층석탑을 관리하는 사찰이나 암자가 불타 사라져 탑과 석등을 관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랜 세월을 지나며 자연적으로 무너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오복영 회원은 “3층석탑의 위치가 군사용어로 공제선상에 위치해 있어 약간의 하늘빛만 있어도 야간에도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다”면서 “큰 규모와 위치로 봐서 과거에는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 영암을 알리고 영암하면 떠오르는 랜드마크의 역할을 했을 것이고 또 귀부석등에 불을 밝힘으로써 멀리서도 석탑이 환상적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었다”면서 조각난 유물들을 보며 아쉬워했다.

한편 이번 조사한 3층석탑과 귀부석등은 사자봉 3층석탑과 귀부석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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