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고종 강제 퇴위, 군대 강제 해산…의병항쟁 대규모·조직적으로 전개

기사승인 2020.05.15  10:59:24

공유
default_news_ad2

- 영암 의병, 기정진 계열과 최익현 계열이 함께 의병 일으키는데 앞장
영암 의병사(12)
■ 한말 의병 전쟁과 호남 의병

‘영암 의병’은 영암지역을 근거로 활동한 수많은 의병장을 말한다. 전북 무주 출신이지만 주로 영암에서 의병 활동을 한 의병장 강무경이 대표적이다. 강무경 의병장은 의병활동 중 금정 출신 처녀 양방매와 결혼하여 부부 의병으로 활동했다. 사진은 일본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 갇혀 있던 호남 의병장들의 모습이다. 앞줄 왼쪽부터 송병운, 오성술, 이강산, 모천년, 강무경, 이영준, 뒷줄 왼쪽부터 황장일, 김원국, 양진여, 심남일, 조규문, 안규홍, 김병철, 강사문, 박사화, 나성화

보국(保國)을 지향한 ‘중기 의병’

중기 의병은 러·일 전쟁 직후 체결된 한일의정서와 을사늑약 등 일제의 침략에 맞서서 국권을 지키기 위해 봉기한 것이다. 1904년 2월 5일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다. 2월 9일 서울에 군대를 주둔시킨 일본은 2월 23일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였는데, 여기에는 일본 정부가 전략적으로 필요한 지역을 언제나 군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이에 따라 토지들이 일본군의 군용지로 편입되었다. 6월에는 조선의 황무지를 개간하겠다고 일본이 나섰으나 ‘보안회’ 등이 반대 운동을 전개하여 저지시켰다. 따라서 ‘한일의정서’ 체결 직후 의병 항쟁이 불붙었다. 1896년 의병을 일으켰던 허위는 1904년 5월 ‘배일의거통유문’(排日義擧通諭文)을 13도에 발송하였으며, 김동수의 황성의병소와 홍천의병소에서도 격문이 작성되었다.

중기 의병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로 격화되었다. 1905년 7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그리고 8월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체결한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을 복속시키는 장애물을 없앴다.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과 다수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완용·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 등의 서명을 받아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가 핵심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되고 초대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하였다. 늑약이 체결되자 민영환이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자결하자 역시 고위관리 출신 조병세·홍만식 등이 뒤따라 자결함으로써 민족의 자존심을 세웠다. 전국에서 의병의 불길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배경이 된다.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지향한 ‘후기 의병’

후기 의병은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이 직접적 요인이 되었다. 고종은 러·일 전쟁 전후부터 열강에 특사를 파견하여 국권을 수호하려는 외교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5년 6월 탁지부 대신 이용익을 러시아에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를 러·일 강화회의에 들어가도록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승만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내 한국의 주권 유지와 독립 보전에 대한 청원을 전달하게 하고, 한국주재 공사를 역임한 알렌에게도 운동자금 1만 달러를 보내는 등 주권을 지키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미국의 외면으로 실패를 하였다.

고종은 1907년 6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 한국의 주권 회복을 국제사회에 직접 호소하려 하였다. 고종의 신임장을 받고 헤이그에 도착한 이상설·이준·이위종은 일제의 방해로 회담장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일제의 침략상을 담은 글을 각국 대표들에게 보냈다.

또한, 이위종은 7월 9일 신문기자단 앞에서 ‘한국의 호소’라는 주제의 연설을 하였다. 회의 참석이 무산되자 비탄 속에서 식음을 전폐하던 이준은 7월 14일 그곳에서 순국하였다. 헤이그 특사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은 7월 12일 이완용 내각이 고종의 퇴위를 결정토록 하였다. 내각 회의에서 고종의 퇴위를 권유하는 결의가 나오자 고종황제는 “죽어도 퇴위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버텼으나, 결국 19일 황태자에게 양위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7월 20일 순종황제가 즉위하였다. 일제는 새로운 조약을 강요하였다.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한다는 이른바 ‘차관정치’의 내용이 들어 있는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이었다. 이에 따라 통감부가 친일 내각을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중앙과 지방 행정기관에는 일본인 차관을 비롯하여 수천 명의 일본인 관리들이 임명되었다.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된 셈이다.

그런데 극비로 작성된 정미7조약 ‘부수각서’에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8월 1일 해산 명령이 전달되었으나 서울 시위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이를 거부하고 자결하였다. 중대장 오의선 정위도 뒤를 따라 자결하자, 남상덕 참위는 부하들을 이끌고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하였다. 해산 군인들의 목표가 분명해졌다. 8월 9일 광주 진위대를 비롯하여 지방 진위대도 해산된다.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에 따른 분노와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 항쟁은 ‘대규모’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서울 시위대로부터 시작된 해산군인들의 항전은 원주·강화·홍주·진주 진위대로 확대되어 갔다. 이들이 의병에 가담함으로써 의병 전투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후기 의병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문경의 이강년 부대, 원주의 이은찬 부대, 영해의 신돌석 부대, 호남의 기삼연·심남일·이석용·전해산·안규홍 부대, 함경도의 홍범도 부대 등이 대표적인 의병부대이다. 1908년 12월 서울 진공 작전이 전개되는 등 독립전쟁으로 전환되었다.

독립군으로 전환한 ‘전환기 의병’

1909년 일제에 의한 대대적인 의병 진압 작전으로, 의병 전쟁은 쇠퇴기로 들어섰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1910년 국권 피탈 이후에는 의병들의 항쟁이 독립전쟁으로 발전하였다. 홍범도·이진용·박장호 등은 해외에서 의병 전쟁의 전통을 이었으며, 국내에서는 채응언·강기동 등이 의병 전쟁을 계속하였다. 1912년 태인 의병장 임병찬이 주도하여 조직한 독립의군부, 의병장 이석용이 결성한 임자밀맹단, 영남과 충청지방의 의병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대한광복회 등이 대표적인 전환기의 의병이다.

특히 호남지역 의병 출신들이 대부분을 차지한 독립의군부는 전국적인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비록 1914년 조직원들이 체포되면서 와해되었으나 독립 의군부를 주도하거나 참여한 인물들은 대체로 의병계열이었다. 일부에서는 독립의군부가 와해 된 1914년 또는 마지막 의병장이라 불리는 채응언이 체포된 1915년까지를 전환기 의병의 종점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의병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국외로 탈출하여 만주 등지에서 무장 독립운동에 참여하거나 국내에서 글방선생·머슴·술장사 등으로 은신해 있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시위를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앞장선 의병 출신들이 많았다. 의병 전쟁은 1919년 3·1운동 때까지 계속되었고, 1920년대 무장 독립전쟁의 기틀이 되었다.

의병 전쟁의 주도 계층과 사상적 기반

의병의 주도 계층은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다. 처음에는 전직 관료나 유생들이 주도하였다. 유생들이 의병 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은 성리학의 의리론과 존화양이론에 기반한 위정척사사상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학파를 형성한 문인들이 적극적으로 의병에 참여하였음은 이 때문이다. 병인양요 때 척화주전론을 내세운 화서 이항로계(제천 유인석)와 노사 기정 진계(장성 기우만), 그리고 남당 한원진계(홍주 김복한)·정재 유치명계(안동 김보화) 등에서 다수의 의병장이 배출되었다. 호남지방에서는 기정진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노사의 제자이자 친손자이기도 한 기우만은 노사의 뒤를 이은 노사학파를 이끄는 영수로, ‘기산림 (奇山林)’이라 불린 호남지방의 대표적 유생이다.

현실을 개혁하려는 시국관을 가진 노사학파는 위정척사 운동과 의병 전쟁을 주도함으로써 국왕에 대한 충성과 왕조의 옹호, 나아가 국가의 독립과 자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와 함께 화서 계열에 속하는 태인 의병을 이끈 면암 최익현 학풍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 또한, 호남지방의 중·후기 의병 전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영암 의병의 경우, 기정진 계열과 최익현 계열이 함께 의병을 일으키는 데 앞장을 섰다.

‘영암 의병’의 개념

의병을 칭할 때, 의병부대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 대표 의병장을 칭하거나, 의병부대의 근거지를 사용하는 등 기준이 일정치 않다. 의병장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는 한 인물을 통해 의병부대의 성격을 파악하는 장점도 있지만, 그 부대를 구성하였던 인물들을 미처 살피지 못한 문제점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영암 의병’은 영암지역을 근거로 활동한 수많은 의병장·의병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고 말년에 충남 정산에 기거한 최익현이 전북 태인에서 거의를 하였기에 ‘태인 의병’이라고 부르듯이, 전북 무주 출신이지만 주로 영암에서 의병 활동을 한 유명한 의병장 강무경도 ‘영암 의병’의 범주에 당연히 넣을 것이다. ‘영암 출신’인가의 여부도 중요하지만, ‘영암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의병의 실체를 찾는 것이 강조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궁극적으로, 그러한 의병이 ‘활동 가능한’ 영암지역의 역사를 밝히는 데 의미가 있다.<계속>

박해현(초당대 겸임교수)·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박해현/조복전 @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