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24>변산반도 관음신앙(下)

부안 위도 원당제 부안 위도 대리마을은 매년 정월 초사흗날 해상안전을 기원하는 원당제와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굿을 거행한다. 이는 불교의 관음신앙이 민간 신앙화되면서 무속신앙과 결합된 불교의례이다. 오른쪽 사진은 보타락산의 남해관음대불.

지난 호에 국립공원 내변산에 있는 월명암의 창건설화를 소개한 바 있다. 설화는 관선불 마을에 목선이 한 척 떠내려온 것으로 시작되고 있다. 목선 안에 스님이 홀로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설화의 형식이 전형적인 ‘해안 표착형’임을 알 수 있겠다. 불교학자 홍윤식은 불상의 출현 방식을 하늘에서 내려온 ‘천상 강림형’, 땅에서 솟은 ‘지중 출현형’, 그리고 배가 해안에 표류하여 도달하는 ‘해안 표착형’으로 분류한 바 있다.

변산반도의 사찰 창건설화는 ‘해안 표착형’

‘해안 표착형’ 설화는 삼국유사에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 석탈해 신화에서 가락국 해안에 닿았던 궤를 실은 배가 아진포에 표착하는 내용, 신라 진흥왕 때에 장육존상을 주조할 황금을 실은 배가 석가삼존상을 안치할 인연의 국토를 찾아 신라의 해안에 표착하는 내용 등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이를 통해 일찍부터 바다를 통한 해양세력의 이동과 해상을 통한 불교문화의 전래방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진흥왕 대의 사실로 나와 있는 고창 선운산에 있는 대참사의 창건설화에 ‘해안 표착’ 설화가 등장하는 것도 한반도 서해안에 그러한 방식의 불교문화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원래 도솔암 앞에는 법화굴이 있었는데, 신라의 의운화상이 머물며 수도하던 곳이다. 이 때에 산 아래 죽도 포구에 한 척의 돌배가 와서 있었는데 그 배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오므로 어민들이 이상하게 여겨 가까이 가서 보려고 하면 그 배가 물러가 버렸다. 마을 사람들에게 이 말을 들은 의운화상이 제자와 더불어 포구에 나아갔더니 그 배가 해안에 다가왔다. 의운이 그 배에 들어가니 문득 불경과 석가모니상과 가섭 아난 등 16나한상이 배 가운데에 병렬되어 있고 또 금인 한사람이 오른손에 옥으로 된 돛대를 잡고(하략)”

대참사의 창건과 관련된 설화의 일부이다. 변산반도의 줄포만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섬인 죽도는 행정구역상으로는 현재 전북 고창군 부안면에 속한다. 죽도는 외죽도와 내죽도가 있는데 현재 내죽도를 중심으로 포구가 형성되어 있다. 고려시대 송나라 사신인 서긍이 이끈 사신단이 귀국길 죽도에 정박하여 하룻밤을 묵었다는 내용이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실려 있다. 죽도를 통해 줄포만으로 들어오는 해로가 일찍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죽도를 통해 불교유입 사실을 전하고 있는 대참사 창건설화는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여 준다고 믿는다.

사단항로를 통해 관음신앙이 유입돼

필자는 마라난타가 포교를 위해 처음으로 들어온 곳이 영산강 하구와 가까운 불회사임을 살폈다. 그러나 불교 초전설화가 남아 있는 또 다른 곳이 영광 불갑사이다. 이들 사찰들이 서해안의 포구와 가까운 곳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대참사의 창건이 서해를 통해 유입된 불교와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곡성 옥과의 성덕산 관음사 창건연기설화에 진국(晉國) 사람이 396년에 옥과현으로 관음신앙을 가져왔다는 내용이 있다. 옥과의 관음신앙 역시 영산강 하구를 통해 유입되었을 것이다. 이때 관음신앙의 유입은 청해진 부근-양저우·명주 사이를 잇는 동중국해 사단항로(斜斷航路)를 통해 이루어졌다.

마라난타도 이 항로를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사단항로를 이용하여 마한이나 백제에 불교문화가 유입되면서 자연스레 서해안 지역에 불교가 발달하게 되었다. 특히 해양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관음신앙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운산과 변산반도에 위치한 대참사·선운사·내소사 등의 창건설화가 관음신앙과 연결되어 있다. 창건 시기도 대체로 6세기 무렵이라는 특정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그 무렵이 중국 남조와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던 시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된다. 마라난타가 입국할 때 이미 소개된 바 있던 관음신앙은 중국에서 계속 유입되며 발전을 거듭하였다. 마한·백제 시기에 융성한 관음신앙이 이 무렵 일본에 전파되었던 것은 우연의 일이 아니라 하겠다.

관음신앙은 절강성 보타락산 계통

그런데 변산반도의 관음신앙은 해상항로의 안전을 기원하는 중국 절강성 주산군도의 보타락(가)산 관음신앙과 같은 계통이다.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주산군도에서 출발한 사신단이 부안의 죽도와 위도에 당도하는 것으로 보아, 주산군도와 변산반도 사이에 사단항로가 열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항로를 통해 보타락산 계통의 관음이 변산반도에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관음상을 돌배에 싣고 와서 포구에 도착하여 관음도량을 조성하는 설화 등 변산반도의 사찰들의 창건설화 구성이 보타락산 계통과 흡사하다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다.

변산반도는 관음도량을 조성하는 창사연기설화가 다양하고, 관음도량에 백의관음보살도가 벽화와 탱화, 당신도로 그려져 예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등 관음신앙의 덩어리이다. 변산반도의 사찰에 현재 남아 있는 관음보살도는 18세기 이후 것이 많다. 억불책으로 주춤하던 조선불교가 18세기에 들어가 새로운 서민 지주들의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새롭게 발전을 모색하면서 중창을 거듭하는데, 이 무렵 중창된 사찰들의 벽화가 대부분 관음보살도였다고 하는 사실은 그 이전에 관음보살도가 기존 사찰에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변산반도 관음신앙과 보타락산의 차이

그런데 이 벽화를 통해 알 수 있는 변산반도의 관음신앙은 원래 중국 보타락산의 관음상과 약간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보타락산의 수월관음보살은 바닷가에 걸터앉아 있는 곳이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하는 바위산이지만, 부처의 발은 바다 속에서 솟아오른 연화좌대에 올려놓고 있는 거인상이다. 현재 일본 가가미신사(鏡神社)에 소장된 14세기 초에 제작된 고려 수월관음도가 이러한 보타락산의 수월관음과 같은 화풍이다.

그러나 변산반도에 있는 사찰들의 벽화와 탱화를 보면 보타락산의 관음도 형식에서 약간 벗어나 해중용출형의 관음도가 그려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예컨대 바다 위를 자유자재로 걸어 다니거나 바람을 가르며 항진하는 모습이다. 백의관음보살이 보타락산에 있는 게 아니라 황해바다를 떠돌아다니며 항해의 안전을 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중용출형은 바다 위에서 바위가 솟아나고 그 위에 관음보살이 앉아 있는 내소사 석포마을의 관음연기설화에서 확인된다.

변산반도의 관음상이 보타락가산의 수월도와 약간 달리 바다 위를 떠돌아 다니게 형상화된 것은 당시 한반도와 중국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신앙의 필요성과 관련이 있다. 그러다 보니 후대로 내려오면서 보타락산의 관음신앙이 점차 민간신앙과 습합되고 있는 경향이 나타난다. 부안 위도 대리마을의 원당에 백의관음보살도가 당신도로 걸려 있다.

현재 대리마을은 매년 정월 초사흗날 해상안전을 기원하는 원당제와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굿을 거행한다. 우리에게 위도 띠뱃놀이로 알려져 있는 원당제는 바다에 돌출한 바위산 위에 있는 원당에서 봉행하고 용왕굿은 포구에서 봉행한다. 곧 불교의 관음신앙이 민간 신앙화하면서 무속신앙과 결합된 불교의례라 하겠다. 원당의 백의관음보살입상도는 변산반도와 위도를 관음성지로 묶을 수 있는 근거인 동시에 위도와 변산반도 사이가 해상항로의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계속>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