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의 숭고한 ‘인도주의’에 빠져 전예행초 4체 필사
자동차·카드·컴퓨터 등을 거부하며 옛 선비의 삶 고집

▲논어 전문을 4가지 서체로 필사한 동기가 있습니까.

공자 선생이 2500여년 전 그토록 갈구하고 구현코자 했던 ‘인도주의’를 좋아하고 존경했어요. 이것이 논어 전문을 전·예·행·초 4가지 서체로 필사한 동기입니다. 9년이란 시간이 걸렸지요. 춘추전국시대라는 옛날 옛적 그 어느 책에 이처럼 숭고한 인간애의 사상이 구현되어 있었던가요. 공자의 말은 어느 한구석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단지,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과 현대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이 다를 뿐이지요.

▲논어는 현대적으로 어떤 의미를 줍니까.

논어만큼 패권주의 정치를 거부하고, 인간애와 정도로의 회귀를 역설한 책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인도주의 사상이 그대로 배어있는 게 논어입니다. 그런 점에서 초현대시대 서예미학이 주는 의미는 적지 않습니다. 속도만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그에 부응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네 삶에 행복을 가져다 줍니까. 잠시 쉬어가는 삶, 사색이 따르는 삶이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카드·컴퓨터 등 현대의 이기를 거부하는 삶을 살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내 나름 3C(자동차·카드·컴퓨터)를 거부합니다. 자유스러워지고 싶어서 입니다. 오히려 공부에 몰입할 수 있어 좋습니다. 스마트폰 중독은 천박한 지식과 사고의 경량화만 가져올 뿐입니다.

▲서예는 어떻게 입문하게 되었습니까.

유년시절 서당에서 배웠던 서예가 이후 강창원, 유인식 선생 등을 거쳐 1976년 대학원 시절 우리나라 서예의 대가인 여초 김응현 선생과의 만남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나의 스승 여초 선생은 한나라 예서체와 북위 육조체의 예리하면서도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한 해서미학를 발전시켰습니다. 추사와 어깨를 겨룰 정도인 여초 선생은 국내에서만 제자가 줄잡아 7천여 명에 이릅니다.

고독하고 지루했던 나의 공부는 하얀 화선지 위에 때로는 어설프게 때로는 화려하게 그어진 점획들을 보면서 한숨과 미소가 수없이 교차한 학습 도정을 겪어야 했습니다. 컴퓨터 시대에 결코 맛볼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역사적으로 서예의 대가와 특징을 잠깐 소개해 주십시오.

우선 왕희지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유연함과 정치함이 융합되어 우아미를 구축한 인물입니다. 구양순도 있습니다. 그는 정치함과 엄숙함으로 사람들을 질리게 하고 이로 말미암아 전율케 하는 해서미학을 들 수 있습니다. 날캉 날캉하면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대나무 같은 필획을 구사한 저수량, 바람 한 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치밀한 구성의 주눅, 균형의 극치를 이룬 이양빙 등 서예미학 대가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조선의 인물들도 중국에 못지않습니다. 명필 추사 김정희가 대표적입니다. 추사는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겪은 고난과 물먹은 필획을 토해 내었습니다. 그 울한이 응축된 구성은 천고불휴의 명품으로 남아 후학들을 사로잡습니다.

광개토태왕비의 서체도 조선 후기에 들어 유행했던 서체였습니다. 전서체와 예서체가 융합된 특이한 서체로 당시 중국에는 그런 서체가 없었습니다. 즉 중국의 전통적인 예서와 전서가 가미되어 고구려의 독특한 서체가 만들어졌습니다.

현대에 들어서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1927~2007)이 있습니다. 여초 선생은 법고창신에 기반을 둔 자신만의 서예미학을 창출해 한국 서예미학의 경지를 한 단계 격상시켰습니다. 그래서 현존 중국 서예가들을 압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2001년 해남군이 고산 윤선도를 기려 제정한 제1회 고산문학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실 정도로 고산문학에도 많은 업적을 남기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고산 윤선도는 시조문학의 최고봉입니다. 말랑말랑한 찰떡같은 느낌의 작품이랄까, 최초의 한글 시조인 어부사시사를 보면, 꾸밈없는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고 그림 같은 회화성을 볼 수 있습니다.

고산이 만든 시조에는 조선 시대에서도 가장 철학과 문학성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 작품이 많습니다. 내 이승의 삶을 끝내고 먼 훗날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또다시 고산 윤선도를 연구할 것입니다.
 
▲요즘 시대에도 한문과 서예 공부가 왜 필요한지 고향의 후학들에게 지침이 될 만한 말씀을 한마디 해주십시오.

중국에는 한문·서예에 관계된 대학 학과가 수백 개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현재 지방의 몇 개 대학 이외에는 없습니다. 2,600여년 전 공자가 논어와 같은 사상을 펼쳤다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대학생들이 논어를 읽고 사회에 나가면 정말 좋다고 늘 학생들에게 강조합니다.

인간은 물질보다는 정신 영역을 충만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서예란 경박스런 사람을 진중하게 만들어 줍니다. 어르신에게는 손가락을 움직여 치매 예방도 기할 수 있습니다. 붓으로 한 획 한 획을 그을 때마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컴퓨터로 모든 것을 만들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가문의 전통을 쉽게 버리는 예술성 없는 규격화는 평가 절하될 수밖에 없습니다.

공자는 수많은 제자 가운데 유달리 안회를 아꼈습니다. ‘밥 한 그릇, 물 한 바가지’로 연명할 만큼 가난함에도, ‘안빈낙도’를 이어간 안회가 남달리 공부를 좋아한 데다 덕성이 뛰어난 까닭이었습니다. 논어에서 공자는 어느 순간에도 길을 잃지 않도록 인이나 덕과 같은 핵심 요소들을 엮어냈습니다. 안회는 이것을 실천한 제자였습니다.


 

문영오 교수는?

△영암읍 장암리 출생(1940년)
△동국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 취득 △청주대 한문교육과 교수
△동덕여대 국문과 교수
△동덕여대 인문대학장
△동덕여대 대학원장
△동덕여대 명예교수(현)
△잡지 수필공원 창간호 동인(1981)
△창조문학 신인상(1992·수필)
△제1회 고산문학대상(2003년)
△서울시 서예부문 초대작가(1994~1999)
△동방연서회 자문위원
△한국문화연구원 원장 <저서 및 논문>
△고산문학상론 외 8권
△고산의 한시연구 외 80여 편 등



대담=문배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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