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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남일 의병장, 국사봉서 영암의병과 ‘호남의소’ 결성

기사승인 2019.10.11  1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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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암 의병사(2) ■의향(義鄕), 영암
목숨 건 항쟁 한말 영암출신 의병 190여 명에 달해

금정 국사봉 의병본부는 ‘호남의소’ 사령부였다. 그리고 ‘호남의소’의 핵심은 ‘영암 의병’이었다. 이곳을 거점으로 남평·능주·보성·강진·장흥·해남·나주·무안 등 전남 중·남부지역을 호남 의병들이 장악하였다. 사진은 일본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 갇혀 있던 호남 의병장들의 모습이다. 앞줄 왼쪽부터 송병운, 오성술, 이강산, 모천년, 강무경, 이영준, 뒷줄 왼쪽부터 황장일, 김원국, 양진여, 심남일, 조규문, 안규홍, 김병철, 강사문, 박사화, 나성화.

호남 의병의 성지, 영암

우리 민족은 나라가 어려울 때, 강한 애국심을 표출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그리고 국권 피탈 과정에서 전 민족이 목숨을 건 항쟁을 하였다. 이때 분연히 일어난 ‘의병’은 우리 민족을 존망 위기에서 구하였다.

한국 근대 민족운동의 커다란 줄기인 의병 전쟁은 일제의 국권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무력투쟁으로, 무려 20년 넘게 전개되었다. 한말 의병에 대한 최초의 저술인 ‘의병전’을 기술한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계봉우(桂奉瑀, 뒤바보)는 “의병이라 하면, 그 명사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라고 말했다.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의병들에 대한 평가는 아무 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영암을 주무대로 활동하며 빛나는 호남 의병의 전설이 된 심남일은 “의병은 아침에 적을 치고 저녁에 조국의 산에 묻히는 것”이라 하였다. 얼마나 가슴 뭉클한 이야기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은 “‘의병’은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군’(民軍)”이라고 정의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일어난 의병 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난 의병의 전통을 계승하여 오로지 애국심 하나로 일어선 사람들이다.

한말 의병은 박은식이 그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무장한 의병 피살자가 10만 명이고, 무고한 촌민으로 학살당한 자는 독립 이후가 아니고서는 그 통계를 구할 수가 없다”라고 기술할 정도로 의병에 가담한 숫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은 그 죄목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한국 의사(義士)들과 그의 가족 10여만 명을 죽인 일”을 들었다.

일제가 작성한 ‘조선폭도 토벌지’등을 분석한 연구에서도 가장 활발히 의병 활동이 이루어지던 1907년부터 1911년까지 불과 5년 동안 활동한 의병 숫자를 약 14만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또 다른 일제가 작성한 통계에도 1907년 7월부터 11월까지 불과 5개월 동안 피살된 의병 숫자만 1만5천 명으로 나와 있다. 한말 의병으로 이름을 남긴 의병들은 10만 명이 아니라 적어도 수십만 명은 거뜬히 넘으리라는 추정의 근거들이다.

의병 전쟁의 중심에 ‘호남 의병’이 있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만약 호남이 없다면, 이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 하여 ‘호남 의병’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한말 의병 때도 마찬가지다. 박은식이 “대체로 각 도의 의병을 말한다면 전라도가 가장 많았다”라고 언급하였다. 호남 의병과 일본 군경의 교전 횟수·교전 의병 수는 1908년 전국 대비 25%와 24.7%를, 1909년 46.6%와 59.9%를 차지하였다. 전국적으로 의병 전쟁의 기세가 주춤하던 1908년 무렵부터 오히려 격렬하게 전개된 호남 의병의 혈전(血戰)은 눈물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호남 의병 중심에 ‘영암 의병’이 있다. 을묘왜변 때 의병을 일으킨 양달사는 조선 최초 의병장으로, ‘임진 의병’의 선구였다. 임진왜란 때 모병을 하러 영암에 들른 이순신 장군은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글을 영암에 남겼다. ‘영암 의병’을 비롯한 영암인들의 인적·물적 도움을 받았기에 나온 말이다.

1895년 을미의병 때, 의병을 조직하여 호남 의병의 기개를 보였던 영암 의병은 1907년 후기 의병(정미의병)때 호남 의병 전쟁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박평남 등 영암 의병장들이 주도하여 ‘호남창의소’를 조직하였다. 함평 출신 심남일 의병장은 ‘영암 의병’과 손잡고 ‘호남창의소’를 계승한 ‘호남의소’를 영암 국사봉에서 결성하였다. 스스로 ‘전남 제일 의병장’이라는 평가를 할 정도로 빛나는 전쟁을 이어갔다. 국사봉 의병본부는 ‘호남의소’ 사령부였다. 이곳을 거점으로 남평·능주·보성·강진·장흥·해남·나주·무안 등 전남 중·남부지역을 호남 의병들이 장악하였다. 조선을 식민 지배하려는 일본의 계획이 차질을 빚음은 물론이다. 오로지 ‘호남의 소’의 뛰어난 활약 때문이다.

‘호남의소’의 핵심은 ‘영암 의병’이다. ‘영암 의병’은 단순히 ‘영암 출신’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암 지역에서 활동한 모든 의병’을 포함한다. 영암 출신은 아니지만, 영암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활동한 의병들이 적지 않다. 심남일·강무경 의병장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당연히 ‘영암 의병’ 이다.

이제까지 저자가 각종 자료를 토대로 확인한 한말 영암출신 의병은 190명에 이른다.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한 의병장도 20명 남짓이나 된다. 한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의병장을 배출한 고을은 없다. ‘최초의 여성 의병장’으로 추앙받는 양방매도 영암 금정 출신이다. ‘영암 의병’이 한말 ‘호남 의병’을 대표하고 있다. ‘영암 의병’이 없다면, ‘호남 의병’은 없다.

‘영암 의병’의 빛나는 의병 전쟁은 1919년 영암 구림과 영암읍에서 일어난 3·1 독립 만세운동, 영암 영보항일 농민항쟁으로 계승되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등재된 영암출신 애국지사만 50인이 넘는다. 영암출신 선열들이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열기는 민주·인권에 입각한 대한민국 건설의 원동력이 되었다. 영암을 ‘의향’(義鄕)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박해현·조복전>

 

 

박해현·조복전 @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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