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병장 전몽성과 형제들<1>
조부는 사헌부감찰과 흥양현감, 부친은 첨지중추부사 지내

최근 일본의 ‘경제 보복’ 행위에 대한 전 국민적 불매운동이 확산되고, 전라남도가 ‘호남의병 역사공원’을 조성할 계획인 가운데 예로부터 외세에 맞서 싸웠던 영암출신 의병장들이 많았으나 사료부족 등으로 잊혀져만 가고 있다. 그 중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몸을 바쳐 싸웠던 전몽성 형제들의 이야기가 있다. 본지는 일찍이 호국정신으로 분연히 일어서 항일 구국투쟁을 하다가 순절한 전몽성 형제들의 이야기를 긴급 시리즈로 엮는다.        <편집자 주>

(1)가계(家系)와 전몽성 형제들

전몽성(全夢星)은 백제 온조왕과 함께 십제(十濟)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공신 환성군 전섭(歡城君 全聶)을 시조로 하고 있다. 고려 태조의 건국에 공헌한 천안부원군 전락(天安府院君 全樂)을 중시조로 삼은 천안(天安)을 본관(本貫)으로 하고 있다. 시조로부터 37세에 이르러 고려조 충열왕 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에 봉해진 두평군 전려(兜平君 全呂)를 씨족의 파(派), 즉 두평군파(兜平君派)로 세세손손 이어오고 있다, 전려(全呂)로부터 희-문식-천근(熙-文軾-天近)을 거쳐 경기도 파주(교하원 交河元) 출신 41세 전사민(全思敏)은 공조판서(工曹判書) 재직 중 직간(直諫)으로 인해 왕의 진노를 받아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좌천되었다가 강진군 태동으로 재배(再配)되었다. 상례-귀-윤온-순(尙禮-貴-允溫-純)을 거쳐 47세 길촌 승문(吉村 承文)은 새로운 주거지를 물색하여 1504년(연산군 10년) 지금의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로 이거해 씨족(氏族)의 터전을 잡아 번성해 왔다. 전승문(全承文)의 자(子)가 윤(倫)이고 윤(倫)의 자(子)가 방필(邦弼)로 몽성(夢星)의 부친이다. 전몽성(全夢星)의 조부(祖父) 윤(倫)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과 흥양현감(興陽縣監)을 지냈고 부친(父親) 방필(邦弼)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전몽성(全夢星)의 형제는 몽일(夢日) 몽성(夢星) 몽진(夢辰) 몽태(夢台) 4형제다. 전몽일(全夢日)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무안만호(務安萬戶)를 지냈다. 아들 경홍(敬弘)과 도홍(道弘)은 숙부(叔父) 몽태(夢台)와 함께 1624년(인조2년) 이괄(李适)의 난 평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책록 되었다. 경홍(敬弘)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전몽성(全夢星)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휘하에서 금산전투에서 의병으로서 충성을 다 하였으며 함평현감(咸平縣監)을 제수받아 선정을 베풀었고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는 율치(栗峙 밤재) 전투와 해암포(海巖, 지금의 石浦), 유점동(鍮店洞) 전투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중과부적으로 동생 몽진(夢辰)과 함께 순절하였다. 아들 여홍(汝弘)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며, 제포만호(薺浦萬戶)를 역임하고 1598년(선조31년)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노량대전에 참여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워 선조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에 책록되었다.

전몽진(全夢辰)은 형 몽성(夢星)과 함께 율치(栗峙)와 해암포(海巖浦), 유점동(鍮店洞)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우고 형 몽성(夢星)과 함께 순절하였다.

전몽태(全夢台)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며, 의병으로 출정하는 형 몽성(夢星)의 요청에 따라 어머니를 모시고 전란 중 효행을 극진히 하여 효자의 표상이 되었다. 1624년(인조2년) 이괄(李适)의 난 평정 시에는 김완(金完) 장군의 휘하에서 조카 경홍(敬弘) 도홍(道弘)과 함께 난의 평정에 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전몽성(全夢星) 형제들은 우애가 유난히 돈독하였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였으며,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하여 장동사(長洞祠, 몽성 몽진 몽태 배향), 충효문(忠孝門, 충신 몽성, 효자 몽태), 신도비(神道碑 몽성, 몽태) 등이 세워지고, 불후의 업적을 기리며 충효(忠孝)의 귀감(龜鑑)으로 삼고 있다.

(2)역사적 배경

시대가 인물을 낳는다고 했던가? 전몽성(全夢星) 형제들의 시대는 우리나라 가장 큰 국난의 시기인 임진왜란(1592년)과 정유재란(1597년)이 발발하여 온 국민이 고난의 터널을 지나는 때였다. 그리고 임진란 이후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어 반란을 일으킨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해야 할 국가적 혼란의 시기이기도 했다. 여기에 전몽성(全夢星) 전몽진(全夢辰) 전몽태(全夢台) 형제들과 전여홍(全汝弘) 전경홍(全敬弘) 전도홍(全道弘) 등 이세(二世)들이 분연히 일어나 전투에 참여하여 나라를 구하고 안정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①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통일의 여세를 몰아 대륙침략을 꾀했다. 명나라를 정벌한다는 구실로 조선에 대해 길을 비켜달라는 이른바 명정가도(明征假道)요구를 한 것이다. 즉 조선을 침략하고 이를 밟고 명나라를 손아귀에 넣겠다는 심산이었다. 물론 조선에서는 단호히 거절했다.

이를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리나라에 가까운 바닷가 큐슈(九州)의 사카현(佐賀縣) 가라쓰시(唐津市)에 나고야성(名護屋城)을 쌓고 30만 대군을 규합했다. 드디어 1592년 4월 13일 아무런 대비가 없던 조선을 침공한 것이다. 앞잡이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등이었다, 왜군은 우리 군이 갖지 않은 조총(鳥銃)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당파 싸움이 시작되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국정보다는 자파의 세력 확장에만 골몰했다. 이 와중에 일본의 상황을 정탐하러 간 서인(西人)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 동인(東人)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은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면담하고 돌아와 각각 정반대의 견해를 보고했다. 서인 황윤길은 침략의 위험성이 있으니 대비해야 한다 보고하고, 동인 김성일은 침략을 할만한 인품이 되지 못한다고 보고하여 결국 아무 대비도 못하게 하는 씻지 못할 오판을 가져오게 했다.

게다가 10만 양병(養兵)을 제의한 이율곡(李栗谷)의 제안도 묵살된 채 국가의 방위인 무(武)를 경시하고 문(文) 위주의 국정운영으로 나라의 방위력은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1591년 4월 23일 전라 좌수사로 여수에 취임하여 전력 확보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신조로 왜군의 해상진출을 방어하는 데 큰 방벽이 되었다.

왜군은 부산포에 상륙하여 거침없이 북상하였다. 이를 막는 방어선인 신립(申砬) 장군의 충주전투는 무참한 패배로 끝났으며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義州)로 몽진을 떠나버려 백성들은 분노와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 예상치 못했던 의병(義兵)이었다. 정규군이 아니면서 여기저기 일어난 의병은 왜군의 진출을 저지하고 퇴각시키는 큰 역할을 했다. 그 중에서도 호남의 의병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으뜸이었다. 문신(文臣)이며 문장가인 광주출신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은 금산(錦山) 전투에서 수원부사를 역임한 나주출신 김천일 의병장과 화순의 최경회(崔慶會) 의병장은 진주성 전투에서 목숨을 바쳐 나라에 헌신했다. 이 의병장의 휘하에서 또는 별도의 독자적인 싸움에서 진충순사(盡忠殉死)한 의병들이 많았다. 전몽성(全夢星)은 임진왜란 때에는 고경명(高敬命) 휘하에서, 정유재란 때에는 동생 몽진(夢辰)과 함께 고향 영암의 율치(栗峙 밤재)에서, 해암포(海巖浦) 유점동(鍮店洞) 전투에서 헌신 순사(殉死)하였다.

②이괄의 난

인조는 1623년 인조반정이라는 변란을 거쳐 광해군(光海君)을 축출하고 조선 16대 왕위에 올랐다. 인조반정에 기여한 공로를 평가하는 논공행상(論功行賞)에 있어 공로에 비해 낮게 평가 받아 2등 공신에 책록되어 외방인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된데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인조 취임 1년만인 1624년(인조2년)의 일이다. 이 난을 평정하는데 영암군 서호면 출신 학성군 김완(鶴城君 金完) 장군의 휘하에서 전몽태(全夢台)와 전몽일(全夢日)의 아들 경홍(敬弘)과 도홍(道弘)이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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