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오 준 금정면 출생 광주시인협회원

1919년 3월 1일의 기미독립 만세사건을 재조명코자 한다.

우리는 기미독립 만세사건을 유관순 열사만 생각하기 쉬운데 당시 신분이 낮아 천대받았던 전국의 기생들과 교사 등 각계 여성들이 많이 참여했고 서대문 형무소에서만 33명의 여자 수감자가 수감되었다. 여성 참가자 3인방은 유관순(이화여전) 김향화(수원기생조합) 권애라(이화여전)를 꼽는다.

빼어난 미모의 김향화는 수원 기생으로 1919년 3월 29일 다른 기생 33명을 이끌고 수원경찰서 앞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투옥된 그는 법정 진술에서 “조선의 기생들은 일본 기생들과는 다르다. 적어도 조선 기생은 나라를 사랑할 줄 아는 기생이다.”라고 말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권애라의 남편은 의열단원 김시현 열사로 일본 명지대를 졸업하고 국내 책임자로 일제에 의해 6차례 투옥당하고 15년을 복역했다. 영화 ‘밀정’에서 공유가 김시현 역을 맡았던 그 주인공이기도 하다. 해방 후 김구가 이끄는 한독당 출신으로 남북협상 때 김구와 함께 평양에 갔고 국회의원도 지냈다. 6.25한국전쟁 때 백성을 버리고 부산까지 도망가고도 한 마디 사과 없는 대통령 이승만을 의열단 출신 동지 류시태와 함께 1952년 6월 25일 부산 충무동에서 6.25전쟁 2주년 기념식에서 권총으로 저격했으나 불발되어 무기징역 후 4.19혁명으로 석방되었다. 당시 김시현은 66세요, 류시태는 63세의 노익장이었다.

권애라는 강화에서 출생해 개성에서 컸고 이화학당과 이화여전을 졸업한 엘리트다. 유관순의 이화학당 2년 선배로, 1919년 2월 26일 독립선언서 80매를 호수돈 여고에 전달했고 어윤희 등과 함께 개성에서 만세운동을 부르다 투옥되었다. 유관순과 서대문형무소 입감 동기다.

출옥 후에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해방이 되자 한독당으로 안동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김향화는 2년 복역 후 행방불명이 되었고 2009년 훈장을 수여했으나 불행히도 후손이 없어 수원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파고다공원의 기미독립 만세사건의 주도적 참여자 33명은 종교 지도자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당시 평소에 충효를 외치던 벼슬아치나 사대부는 한 명도 없고 전부 중인 이하의 백성들이 주류를 이뤘고 기생들도 목숨을 걸고 참여했다.

1919년 3월 4일 진주권번의 기생들이 뒤를 이어 3월 29일 수원권번의 김향화, 4월 1일 해주권번의 문월선, 4월 2일 통영권번의 정막래. 이소선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 당시는 언론 매체라곤 한성순보 등 신문밖에 없어 지방에 소식이 전해지기까지는 빠르면 3일, 늦으면 1주일이 걸려야 한양의 소식을 접할 수 있음에 비해 진주기생들의 발빠른 대처와 용기는 참으로 가상하다. 이는 1593년 조일전쟁 때 왜장을 끌어안고 산화한 진주의 의기 논개의 희생정신의 발로라 여겨진다.

특히 진주기생 산홍은 을사오적 이지용이 거금을 주며 첩을 삼으려고 했으나 “나라 팔아먹은 대감과는 천금을 줘도 싫다.”고 과감히 거절해 끝내 죽음을 선택한 의기였다.

1919년 9월 조선의 치안 책임자로 부임한 지바료는 “조선에 기생이 있는 한 치안유지는 어렵다. 그들이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불 지르기 때문이다.”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손님들에게 독립운동을 독려했던 기생을 사상기생이라 불리며 일경의 요시찰 대상자였다.

손병희의 부인 주옥경도 이른바 사상기생으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도 안전과 지지 기생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의 기생들은 결코 화류계의 여인들이 아닌, 민족정신이 투철한 의기였음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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