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70>마한남부 연맹의 실체를 밝혀줄 서동설화(下)

지난 12월 말, 영산강유역 마한문화권개발사업 일환으로 발굴조사 중인 함평 금산리 방대형 고분에서 ‘인물식륜(埴輪, 하니와)’과 ‘동물식륜’ 조각이 출토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고대 영산강유역 세력과 일본이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는 분석이 뒤따랐다.

필자가 거듭 강조하고 있지만, 마한남부 연맹세력들은 영산지중해를 중심으로 중국, 가야, 왜 등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형성된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를테면 ‘마한 실크로드’를 통해 구축된 ‘영산 르네상스’가 개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독창적인 문화역량을 지닌 정치세력으로 마한남부 연맹이 발전해왔기 때문에 백제가 이 지역을 일방적으로 공격하여 복속시켰다는 것은 고고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하겠다. 결국 이러한 현실을 인정한 백제는 마한남부 연맹과 대등한 수준의 통합을 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서동설화가 그것을 보여준다.

지난 호에서, 서동설화는 부여계인 무왕이 마한계를 적극 끌어안고 있는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살핀 바 있다. 사실 백제는 건국 원년(BC18)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워 동명왕 계승의식을 정신적 기저로 삼아왔다. 동명신앙은 백제 왕실의 이데올로기이자 정체성의 핵심 요소였다. 유이민으로서 부여계가 갖는 한계를 천손의식을 강조함으로써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고구려 또한 대무신왕 3년(AD20)에 동명왕묘를 세워 부여족 계승의식을 강조하였다.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천신의 아들 동명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다투는 경쟁구도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475년 한성 함락으로 동명왕 사당을 상실한 백제는 심각한 정통성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 494년 부여계의 원조격인 북부여가 고구려에 흡수 통합되는 상황이 되자, 백제는 부여계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성왕이 ‘남부여’로 국호를 개칭한 배경이다. 곧 북부여 계승을 강조함으로써 부여계의 정체성을 보완하려 한 것이라 하겠다.
 
‘남부여’ 국호 변경의 배경

그러나 국호 변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결과를 예단하기 힘들 정도로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결정이다. 말하자면 단순히 부여계라는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국호를 바꾸었다고 보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필시 성왕이 국호를 바꾸면서까지 부여계가 백제의 정통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려 했던 절박한 이유가 있었을 법하다.

이에 대해 백제의 남천이후 마한계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지는 것에 대한 부여계의 위기의식의 발로라는 의견이 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필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다만, 기존 견해에서 주장하고 있는 마한 세력은 백제를 구성한 마한 토착세력을 염두에 두고 있어, 필자가 설명하려 하고 있는 마한남부 연맹의 ‘마한’ 세력과는 구분된다.

성왕 대에 이르러 비로소 마한남부 연맹과 큰 틀에서 통합이 이루어져 가고 있었던 같다. 성왕 때 지방행정 기구의 정비가 이와 관련이 있다 하겠다. 이 문제는 별고로 다시 다룰 예정으로 있지만, 고구려와 대회전을 준비하며 신라를 끌어들이고 있는 성왕의 입장에서는 남쪽의 마한남부 연맹 세력과 통합은 매우 중요하였던 것이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대등한 수준의 통합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마한남부 연맹세력에 대해 성왕은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성왕이 부여계의 정통임을 새삼스럽게 강조하며 국호변경을 추진한 배경이라 하겠다. 성왕의 ‘남부여’ 국호 사용은 대외적으로는 북부여 계승을 표방한 것 같지만, 내부적으로는 마한계를 의식한 정치적 행위였던 셈이다. 

그러나 국호 변경이라는 강력한 수단을 동원하여 부여계 중심의 왕실 권력을 구축하려 한 성왕의 의도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한성 수복작전이 실패하고 성왕이 전사하면서 부여계의 정체성 회복운동은 수포로 돌아갔다고 하겠다.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북제로부터 책봉을 받을 때 ‘남부여’왕이 아닌 ‘백제’왕으로 받고 있는 것이 이러한 사정을 말해준다. 하지만 ‘남부여’ 국호사용이 기존 토착세력과 새롭게 편입된 마한남부 연맹세력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가능성도 오히려 크다.

부여계 계승자라는 이데올로기를 표방함으로써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던 성왕의 의도는 실패한 채, 오히려 마한계와 대립 갈등만 야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여하튼 성왕의 의도가 성공하지 못하면서 정국의 주도권은 부여계 왕실에서 새로 편입된 마한계로 급속도로 넘어가는 상황이 전개되었다고 믿어진다.
 
부여계서 마한계로 바뀌는 지배세력

이제 부여계 백제 왕실은 그들의 존립을 위해 마한계를 국정의 동반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양상이 부여계 정체성 회복운동이 사실상 힘을 잃게 된 위덕왕 때부터 나타났다는 의견도 있지만, 혜왕·법왕 대를 거쳐 급속히 정국의 주도권이 마한남부 연맹으로 넘어간 것은 분명해 보인다. 610년 경 무왕 11년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나주 복암리 출토 목간에서 덕솔, 나솔, 간솔 등 백제의 중앙 관직명이 보이고 있다.

이를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이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한 증거라고 하여 백제의 마한 지배의 중요한 근거의 하나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그 무렵은 무왕 스스로 마한계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마한계와 결합을 시도하고 있었던 시기이다. 곧 마한계의 정치적 비중이 커져가고 있던 때였다. 따라서 복암리 출토 목간은 백제가 마한남부 연맹을 지배하였다는 증거가 아니라 마한남부 연맹이 백제와 통합하였다는 근거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필자의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바로 황룡사 9층탑 찰주본기에 나와 있는 ‘응류’라고 하는 국가 이름이다. ‘응류’는 ‘응준’과 같이 사용되는데, 이미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도 백제의 별칭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바와 같이 백제를 가리키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를 토대로 우석대 조법종 교수는 ‘응류’는 ‘백제의 별칭’이라고 살폈고, 그의 주장이 2018년 7월 광주광역시교육청에서 출간한 인정도서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필자가 별도로 자세히 언급한 바 있지만, ‘매’를 상징하는 ‘응류’는 차령이북에 있는 백제를 지칭하는 정치체가 아닌, 차령이남 지역의 마한남부 연맹의 별칭이었다. 그 중심에 영산강유역의 정치체가 있었다.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매는 사슴을 상징한 부여계통의 백제와 달리 마한남부 연맹의 상징이었다. 백제가 5방으로 지방편제를 할 때 남방을 ‘매’와 관련 있는 ‘구지하성’이라고 하였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구지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전북 김제에 해당하는 금구현의 옛 명칭을 ‘구지지산’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 전북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 구지하성이 익산의 옛 지명의 하나라는 사실과 관련지어 볼 때, 매는 차령이남에 있는 마한남부 연맹의 상징물은 분명하다. 그런데 ‘응준’이라는 명문이 있는 유물이 나주 다시들 복암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볼 때, 그 중심지가 영산강유역이라고 하는 것을 말해준다 하겠다.

마한계와 공존을 꾀했던 무왕

그런데 이와 같은 ‘매’를 뜻하는 ‘응류’라고 하는 별칭을 신라가 ‘백제’ 또는 ‘남부여’라고 하는 명칭 대신에 사용을 하였다고 하는 것은 7세기 전반에 이미 백제 정치 중심이 사실상 마한남부 연맹 출신의 지배층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이 과정에서 부여계와 처절한 갈등이 노정되었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무왕은 마한계와 철저하게 상생을 꾀함으로써 정국의 안정을 시도하여 갔다.

그러나 의자왕은 즉위하자마자 귀족세력, 어쩌면 마한계를 숙청하며 부여계 중심의 주도권을 회복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자왕의 의도는 결국 내부갈등만 촉발하여 백제의 멸망으로 이어졌다고 하겠다. 

한편, 서동설화를 보면 백제 무왕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지만,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 미륵사 건립을 도와주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또한 삼국유사 황룡사 9층 목탑 찰주본기에도 645년 무렵 백제의 건축가 아비지가 신라에 초청되어 황룡사 9층탑을 만들었다고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서동설화는 신라가 백제를 통합한 이후 백제인을 회유하기 위한 사상통합 정책의 일환으로 신라 입장에서 진평왕 대에 신라와 백제가 우호적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보다는 원래 마한·백제의 설화였던 서동설화가 신라의 필요에 따라 후대에 변용의 과정을 거치며 나타난 형태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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