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66>498년 백제 동성왕 무진주 원정과 마한(上)

최근 해남 군곡리 패총 유적지에 대한 6차 발굴조사에서 화천(貨泉) 등 중국화폐, 일본토기 등이 발굴돼 이곳이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국제 무역항이었음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며칠 전, 해남 군곡리 패총 유적지에 대한 6차 발굴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화천(貨泉) 등 중국 화폐와 일본 토기 그리고 점토 벽과 가마터가 발굴되어 이곳이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국제 무역항이었음이 확인되었다는 보도였다. 이는, 1986년 군곡리 패총유적이 처음 발굴·조사되었을 때 이미 밝혀진 것으로, 조사가 거듭될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고대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하지만 발굴·조사에 고고학뿐만 아니라 역사학, 민속학 등 인접 학문 학자들도 함께하여 융합적인 분석을 해야 무형의 유물이 발산하는 수많은 흔적들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영산강유역의 정치체, 불인정 유감

지난 11월 23일, 국회에서 ‘영산강유역 마한사회의 여명과 성립’이라는 주제의 세미나가 있었다. 필자도 영암문화원장과 함께 방청객으로 참석하였으나 기조발표를 들으며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발표의 핵심은 영산강유역에 성립된 ‘옹관고분 사회’가 왜와 백제의 각축 속에 휘둘리다 생존을 위해 백제에 복속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지역의 독자적인 정치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AD 3~5세기 무렵에 이르러서야 영산강유역에 고대(마한)사회가 성립되었다(1단계)고 하여, 기원 전후에 성립된 가야사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성립된 역사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AD 5세기 중후반~6세기 전반에 영산강유역에 잠시 마한사회가 전개되다가(2단계), AD 6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해소되었다(3단계)고 하였다. 곧 마한사회의 발전 시기를 불과 100여년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영산강식 토기’와 같은 이 지역에 나타난 무수히 많은 독자적 문화 특질들이 어떻게 생성되었을까에 대한 설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김한남 영암문화원장도 토론 말미에 기원전 2~3세기에 이미 성립되어 있던 마한역사를 기원후 3~5세기에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는가라고 반론을 제기하였지만, 기원 전후에 가야 연맹왕국이 성립되었다고 하는 사실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진다면, “마한에서 가야의 뿌리인 변한과 신라의 뿌리인 진한이 갈라져 나왔다”는 위지동이전의 기록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또한 이 지역의 정치세력을 연맹왕국이 아닌, 그저 지역 토착세력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그렇다면 6세기 중반까지도 ‘방소국’이라는 명칭으로 양직공도에 나타나 있는 마한 남부 지역의 여러 국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더구나 ‘방소국’이라고 하는 표현이 더 더욱 백제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방소국’의 ‘國’은 엄연히 연맹왕국을 지칭함은 분명하다.
 
역사 교과서에 사라진 ‘마한 역사’

결국, 기조강연에서 나온 일련의 주장들은 기본적으로 4세기 후반 백제의 전라도 지배라는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논리전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결정판이 바로 마한사에 관한 언급이 단 한마디도 나와 있지 않은 광주광역시교육청에서 발행한 ‘고등학교 주제로 보는 한국사’(2018.7.2.광주교육청·강원도교육청·세종시교육청·서울시교육청·전북교육청 공동 보조교재)라는 역사 교과서이다. 집필진 속에는 평소 마한사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중요한 교과서 집필에서는 왜 마한사를 전혀 다루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교과서를 편찬한 교육청의 의도는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동안 수많은 예산을 들여 마한사를 복원한다고 발굴·조사를 하고, 학술세미나를 하는 등의 노력들이 기껏 마한사가 사라진 교과서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2017년 전라남도가 주도하여 작성한 영산강유역 마한사 복원 프로젝트를 보면, 마한역사를 교과서에 싣는 것을 최종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실소(失笑)를 금할 수 없다. 왜 이러한 결과가 나왔는지 참회록을 쓰는 심정으로 본질적인 접근을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고대사의 시원(始原)이 되는 마한사는 영영 사라지게 될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임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무진주 친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 필요

이러한 문제는 궁극적으로 전북지역은 물론 영산강유역을 포함한 전남지역이 언제 백제에 복속되었는가에 대한 설명과도 관련이 있다 하겠다. 필자는 앞서 양직공도 백제국사 제기 기록을 분석하여 적어도 6세기 중엽까지 영산강유역을 포함한 전남지역에 독자적인 마한 연맹체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하지만 영산강을 포함한 전남지역이 백제의 영역에 들어간 시기에 대해 이제껏 통설로 여겨졌던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 무렵이라는 설과 달리, 이러한 통설을 받아들이면서도 곧 5세기에 들어 백제가 고구려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군대에게 밀리며 수세적인 입장으로 전환되는 틈을 이용하여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던 전남지역의 마한의 일부 세력들이 백제 중앙 정부로부터 반독립적인 상태로 자치권을 획득하며 독자적인 발전을 하다가 백제 동성왕 20년(498)에 이르러 백제에 복속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이를테면 498년에 이르러 완전히 백제에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삼국사기 동성왕 20년조에 “8월, 탐라(耽羅)가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으므로 친히 정벌하여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므로(이에 탐라를 치는 일을) 그만 두었다”고 한 기사를 주된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록보다 20여년 앞선 문주왕 2년(476)에 “탐라국이 방물을 바치자 왕이 기뻐하여 사자에게 은솔의 벼슬을 제수하였다”고 서술된 삼국사기 기록이 주목된다. 곧 문주왕 때 탐라가 방물을 바쳤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방물을 보내던 탐라가 이를 중단하자 동성왕 때 백제가 군사적 압력을 가했던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곧, 현재의 제주도에 해당하는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자, 이를 징벌하러 동성왕이 무진주 즉, 지금의 광주까지 친정을 하였다면 당연히 광주일대는 이미 백제의 수중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이 주장은 삼국사기에 언급된 기록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더욱 신뢰성 있게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가 마한 남부연맹을 복속시켜 조공을 받을 정도로 국력이 유지되고 있었는지, 더구나 문주왕이 재위 3년 되는 해에 측근 신하에게 피살될 정도로 정국이 혼란스런 상황에서 재위 2년에 조공을 받을 정도로 강성하였는지 납득되지 않는다. 동성왕 역시, 재위기간 내내 정치적 불안정성이 거듭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마한 남부연맹에 대해 강한 군사적 압박을 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점에서 문주왕 2년에 탐라에서 방물을 바쳤다고 하는 기사와 동성왕 20년 무진주 원정 기록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요구되고 있다.
 
‘탐라’는 ‘탐모라’로 제주도가 아니다

문주왕 2년과 동성왕 20년 기사에 나와 있는 ‘탐라’의 위치 문제부터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그동안 탐라를 현재의 제주도로 비정한 이병도의 견해를 많이 받아들였다. 탐라의 제주도설은, 369년 백제 근초고왕 때 전남 지역이 백제의 수중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로부터 1세기가 훌쩍 지난 476년 조공을 바치고, 498년 다시 백제의 압력에 의해 조공을 바치었다면 당연히 제주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성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무진주에 이르렀을 때 탐라가 이를 듣고 죄를 빌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탐라가 반드시 제주도를 가리킨다고만 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바다 건너 탐라를 응징하려고 정벌을 개시하여 무진주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문제가 있다.
말하자면 내륙 깊숙이 있는 무진주가 탐라 곧 제주도를 응징하는 정벌군의 도선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무진주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다시 해안으로 나가서 배를 이용하여 제주도로 군사를 파견하여만 제주도를 평정할 수 있으므로 무진주에 군사가 도착한 사실이 바로 제주도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결국, 동성왕 20년 조에 근거하는 한, 탐라는 무진주와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 인근의 지역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동성왕 20년 8월조의 무진주 친정 관련 기사 말미에 ‘탐라는 곧 탐모라(耽羅卽耽牟羅)’라고 한 할주(割註)가 주목된다. 삼국사기에서는 할주를 처리할 때, 이전(異傳)을 취할 경우 ‘一曰·或云·一云·一名·一作’ 등의 표현을 쓰는데 이 경우에는 ‘탐라 즉 탐모라(耽牟羅)’라고 한 것으로 보아 ‘탐모라’가 ‘탐라’의 이칭이 아니라 ‘탐라’가 ‘탐모라’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동성왕 20년 조의 ‘탐라’는 ‘제주도’를 뜻하는 탐라가 아닌 다른 지역에 있는 ‘탐모라’임을 지칭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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