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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사, 새로운 사료·발굴과 조사정리 필요
학제간의 융합적인 연구의 중요성 인식해야

기사승인 2018.11.11  20: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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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62>마한사 연구의 새로운 방향과 영산지중해

‘양직공도(梁職貢圖)’ 영산강유역의 정치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60983;양직공도&#60984; 백제 사신조에 나오는 ‘방소국’ 등에 대한 분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양직공도’는 양나라 무제의 일곱째 아들인 소역(蕭繹)이 형주 강릉의 자사로 있을 때 형주에 온 외국사절들의 모습과 풍속을 관찰하고 자필로 그림을 그려 해설을 덧붙인 것으로, 양나라 시기에 교류한 백제 등 아시아 국가들을 연구하는데 기본 자료가 되고 있다.

이병도 박사, 일본서기 신공기 기록의 한계

지난 주말 받아본 ‘한국고대사연구’라는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학회지에 게재된 ‘백제 근초고왕대의 마한 영역화에 대한 사료 재검토’라는 논문을 읽으며 거대한 산이 허물어지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즉, 이제까지 백제 근초고왕의 마한정복 즉, 전라도 남해안까지 진출하였다고 이병도 박사가 주장한 근거였던 일본서기 신공기 기록을 차분히 비판한 것으로, “신공기의 백제관련 기사는 고대일본의 백제에 대한 인식이나 백제와 왜의 교섭과정을 파악하는 데에는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으나, 근초고왕대 마한지역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는 근거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글은 서울의 모 대학에 있는 소장학자가 쓴 것으로, 이러한 신공기에 대한 비판 글이 없는 것은 아니나 마한지배 근거로 삼을 수 없다는 관점에서 서술되었다는 점에서 이병도 박사의 통설에 대한 비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병도의 주장은 고고학적인 유물이나 당시 백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오로지 일본서기 기록을 선입관을 가지고 해석한 것으로 결정적인 근거로 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영산강유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수많은 유적·유물은 4세기 후반 이후의 백제 지배를 인정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것들이 많았다.

실제 근초고왕 이후 전개된 정치상황도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기에 적절치 않았다. 결국 이병도 박사의 주장은, 그 주장이 처음 나오던 1958년 당시의 학계 수준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살피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처럼 토대가 빈약한 백제의 마한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는 유물이나 정황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그것을 계속 고집해온 것은 현재 우리 학계의 구조적인 한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한사 재정립 위해 특별법 제정해야

지난 11월 2일 영암문화원, 나주문화원, 광주시립민속박물관이 주관한 ‘국가균형발전과 영산강유역 마한문화 진흥’이라는 정책토론회가 왕인박사유적지 영월관에서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마한사 연구현황과 발전방향’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였다. 마한사 연구와 관련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영호남 지역균형 발전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

국가 재정보다는 지방정부의 한정된 재원에 의지하다 보니 본격적인 추진에 한계가 있다는 얘기이다. 특히 고분 발굴과 같이 많은 비용이 투입되는 사업은 국가재정 뒷받침 없이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미 어느 정도 발굴조사 사업이 완료되고 관련 연구까지 이루어져 있는 가야사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지원법의 제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관계자의 설명에 공감이 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자체의 지원이 1회성 행사가 아닌 10년 이상 꾸준히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주 이야기 하였지만, 오늘날 교과서에 가야사 얘기가 1쪽 이상 서술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발굴·조사 위주의 마한사 연구, 근본적 한계

그런데 1990년대 이후 영산강유역의 경우는 적지 않은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고 연구도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세기 후반에 전라도가 백제에 복속되었다는 주장이 강화되고 있고, 심지어 백제인이 아닌 마한인 왕인박사로 불러야 마땅할 왕인박사 얘기가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동안 이루어졌던 이 지역 마한사 연구에 대한 본질적인 반성을 하게 한다.

말하자면 마한사 연구가 단지 문헌이 없다는 핑계로 오로지 발굴조사에만 의존하지 않았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각종 지리지, 문집류 등에 흩어져 있는 국내자료를 체계적으로 조사 정리한 적은 있는가? 중국이나 일본 등 산재한 수많은 마한관련 자료를 찾아 비교 검토해 본 적은 있는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역사연구의 기본은 문헌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료·발굴, 조사정리 필요

그러나 문헌수집도 중요하지만, 문헌을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고 기술하는가도 중요하다. 말하자면 이제까지 ‘백제의 마한’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였기 때문에 사료해석에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백제의 마한’으로 무조건 읽어달라는 것은 아니다. 사료가 말하는 그대로 해석해 달라는 것이다. 실제 삼국사기나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지리지 등에 보면 마한관련 자료들이 적지 않게 보이고 있다.

또한 사찰에 보관된 불교 관계자료 가운데도 마한관련 자료들이 적지 않게 찾아진다. 이러한 자료들을 비교적 마한사를 상세히 설명한『삼국지』와 『후한서』 동이전 등 중국 측 기록과 비교하며 살피면 의미 있는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은 3세기 후반의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과 그것이 중국 측 기록으로 남을 때 여러 차례의 윤색과정을 통해 서술되었으리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철저한 사료비판을 통해 위 기록들을 국내 사료와 함께 종횡으로 유기적으로 엮어내면 기존의 이해와는 다른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영산강유역 정치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직공도' 백제 사신조에 나오는 ‘방소국’ 등에 대한 분석이 무엇보다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지난 8월말에서야 겨우 ‘양직공도와 마한제국’이라는 주제의 세미나가 비로소 열리는 상황이 말해 주듯이 아직 걸음마 수준이라 하겠다. 이들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고고학적 성과에 '일본서기' 등 일본 자료와 중국측 사서와 연결하여 종·횡으로 살펴보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또한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문헌사료 못지않게 중요한 1차 자료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유적·유물 등 고고학적 자료이다. 이들 자료들은 당시의 구체적인 모습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지만 구체적인 시기를 설정하기가 어렵다는 한계도 엄연하다. 그러나 영산강유역의 대형옹관 고분들이 여러차례 발굴·조사되어 자료들을 적지 않게 제공해주고 있고, 영산강유역 주변지역 또한 도로개설 등으로 인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지역 정치체의 특질들을 분석하는데 유용한 정보를 마련해주고 있다.
 
고분에서 발산하는 무형의 특징을 주목해야

하지만, 고분 발굴사업도 주로 구제 발굴에 의존하여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다 보니 특성을 찾기도 쉽지 않은데다, 그나마도 지나치게 고분의 구조, 토기 등 형식적인 측면이나 유형(有形)의 유물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실제 고분이 발산하는 수많은 무형(無形)의 역사적 현상을 놓쳤던 것은 아닌지 반성을 해보게 된다. 가령,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마한은 “牛馬를 탈 줄 모르고 장례를 치를 때에만 우마를 쓴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가지고 이제껏 ‘(사람대신) 소나 말을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다’는 식으로 해석하여 왔으나, 원문에 충실하면 ‘소·말을 장례치를 때에만 썼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복암리 고분에서 소(牛)를 온전히 매장한 유구가 나와 이러한 기록의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말하자면 영산강유역의 마한지역에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처럼 소나 말을 순장용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위지 동이전 마한조의 내용이 영산강유역 마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서 등에 이것이 갖는 의미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고, 이와 같은 현상을 주목한 연구도 거의 없는 편이다.
 
학제간의 융합적인 영구가 중요하다

결국, 기존처럼 발굴·조사 중심의 마한사 연구에 대한 방향성을 새롭게 설정할 필요성을 느낀다. 결국 어떤 역사적 사실을 일반화하기 위해서는 특징적인 요소들을 구조적으로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동안 무심코 버려졌던 사실, 또는 이해되지 않았던 상황들을 문헌사료와 고고학적 자료를 유기적으로 엮어 해석하다 보면, 영산강유역 정치체들의 구체적인 모습들이 드러나 마한사의 공백을 채우는데 기여하리라 기대한다.


이를테면 문헌 및 유물 등의 1차 사료를 찾으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더불어 현재 찾아진 사료들을 새롭게 해석하기 위한 학제간의 융합적인 연구가 무엇보다 시급함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필자가 엊그제 광주MBC라디오에 출연하여 강조한 ‘영산지중해가 고대 동아시아의 교역의 중심지요, 문화교류의 장’이라는 사실이 교과서에 서술되는 등 진정한 마한사의 복원으로 이어질 것이다.

 

글=박해현 박사 @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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