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태조 왕건은 남해신사의 역사성을 높이 평가했다

기사승인 2018.10.15  10:43:22

공유
default_news_ad2

- ■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58>영산지중해의 국제무역항, 남해포와 남해신사(中)

남해신사 당지. 2001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남해신사는 원래 남해만의 돌출부에 위치하여 영산강하류 주변을 조망하기 쉬운 구릉지대에 있어 해신당의 입지로는 최적이었다.

고려시대 독립된 사전(祀典)체계 형성

옥야리에 있는 남해포구는 영산강 하굿둑이 생겨 항구의 기능이 크게 축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82년 당시까지도 어선 34척, 수산물 어획고가 32만 톤에 달할 정도로 항구의 기능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것만 가지고도 마한의 국제무역 중심지로 번창했을 때 남해포구의 위상을 상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많은 선박들이 왕래하는 곳에는 선박의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해신당이 있었다. 전북 부안 변산반도 해안 절벽 위에 있는 죽막동 제사유적이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지금도 수성당이라는 제각이 있어 해신제를 올리고 있지만, 그곳 유적지에서 4~5세기 마한시대에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많은 선박들의 무사항해를 기원하였던 흔적들이 최근 확인되었다. 죽막동보다 훨씬 많은 선박들이 드나들었던 남해포구에는 이러한 신당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남해포에는 국가에서 祀典으로 관리하였던 남해신사가 일제 강점기 초까지 있었다. 일제의 우리전통 문화 말살 정책에 따라 신사가 훼철되고, 그 땅을 사들인 민간인이 사당 자리에 자기 조상의 묘역을 정비하면서 흔적이 사라졌던 것이 1997년 목포대 박물관의 발굴을 통해  실모가 드러났다. 이후 영암군이 2001년 신사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사가 여러 차례의 간척공사로 인해 지금은 내륙에 위치하여 있지만, 원래의 자리는 남해만의 돌출부에 위치하여 영산강하류 주변을 조망하기 쉬운 구릉지대에 위치하여 해신당의 입지로는 최적이었다.
 
고려사에 남해신사의 사전승격 기록

목포대 박물관의 조사보고서에 “남해신사에 관한 최초의 문헌적 기록으로는 증보문헌비고에 ‘고려 현종 19년(1028년) 비로소 사전에 올렸다’라고 되어 있다. 그 결과 남해신사는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전남지방에서 국제로 등록되었다”라고 서술하며, 고려, 조선시대에 해신제를 모셨던 3대 신사의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남해신사는 고려, 조선 시대에 동해의 양양의 동해묘, 서해의 풍천의 서해단과 함께 3대 해신당의 하나로 이해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보고서의 서술이 부정확한 곳이 적지 않은데다 남해신사의 역사적 위치를 밝히기에는 미흡한 면이 많아 재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가령, 남해신사에 대한 최초의 문헌기록이 ‘증보문헌비고’라고 언급하였는데, ‘고려사’ 현종  16년조에 ‘陞南海神祀田’라는 기록이 나온다. 곧 현종 16년에 ‘남해신을 사전에 승격시켰다’는 것으로, 고려 왕조가 국가 차원에서 남해신사를 관리하였음을 알려준다. 이처럼 조선 초에 편찬된 ‘고려사’에 명백히 나와 있는 남해신사에 관한 기록이 구한말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에 처음 언급되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현종 19년’의 사실도 ‘현종 16년’의 사실의 오기이다. 이와 같이 전문 발굴 보고서가 사실관계에서 오류를 범하다 보니 일반인들은 물론, 심지어 다른 전문가들조차 이를 확인없이 인용하다 보니 사실관계가 혼란스럽게 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고려사의 잡사(雜祀)에 남해신사 편제

또한 남해신사가 고려 현종 때 국가의 사전체계에 편입되었을 때, ‘大祀’에 편입되었다고 증보문헌비고에서 언급하였다고 하여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는 서술들이 많은데, 이 점도 바로 잡아야 한다. 신라의 경우 삼국사기 잡지 제사조에 三山을 大祀에, 악진해독을 中祀에, 명산을 小祀에 각각 등재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경우 세종실록 吉禮에는 명산대천을 小祀로 하고, 국조오례의에서는 악진해독은 中祀에, 명산대천·독제는 小祀에 올라 있다. 그러나 고려는 大·中·小祀와 함께 雜祀를 별도로 독립 항목으로 만들어 놓고, 잡사에 壓兵祭, 醮, 南海神, 城隍, 川上祭, 老人星, 五溫神, 名山大川, 箕子祠, 東明聖帝祠, 藝祖廟 등을 분류하여 놓았다. 남해신 등이 잡사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남해신’이 大祀에 편입되었다는 이해는 잘못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고려사에 ‘남해신’을 모시는 祀典이 유독 별도로 편성되어 있는 것이 주목된다. 말하자면  ‘동해신’, ‘서해신’ 등 이른바 3대 해신과 관련된 사전은 아예 없다. 또한 “無等山이 있다. 일명 무진악, 또는 서석산이라 하는데, 신라에서는 小祀로 하고, 고려에서는 국제를 지냈다”라고 하는 것처럼 명산에서 국가에서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지만, ‘남해신’처럼 별도의 祀典에 독립시켜 살피지는 않았다. 이처럼 ‘남해신’만을 독립된 사전체계로 만들었던 것은 그만큼 남해신사의 제의를 다른 어느 제의보다 특히 중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남해신을 유난히 중시하였던 까닭은 무엇일까?

남해신당 설치가 현종 즉위년 거란의 2차 침입 때, 현종이 나주로 몽진하는 과정에서 이 지역 해신의 도움을 받았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와 관련이 있다는 의견이 있다. 설화의 내용을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서술 전개상 간략히 적어본다.

“고려 현종 원년(1010) 고려의 친송 정책에 불만을 가진 거란족의 성종이 군사 40만을 이끌고 침략하므로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이곳 남해포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그날 밤 꿈에 백발의 수신이 몽탄으로 피신하라고 현몽하여 현종은 즉시 피신함으로써 적으로부터 위험을 피하게 되었다. 이후 이곳에 자신을 도와준 꿈속의 백발수신을 위해 당을 짓고 인근 6개 고을(나주, 영암, 해남, 강진, 영광, 함평)의 수령들로 하여금 일 년에 한 차례씩 제사를 지내게 했다.”

현종 즉위년 거란의 2차 침입 때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이 서경 전투에서 패배하자 현종은 공주를 거쳐 이곳 나주까지 피난을 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호종하는 병사들이 도망을 가거나 심지어 살해 위협까지 당하는 등 고난의 연속이었다. 특히 나주에서 유숙할 때 야간 경비병이 거란이 쳐들어왔다고 잘못 보고하는 바람에 왕이 잠결에 피신을 하였다고 고려사절요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무렵 이미 거란군이 철수를 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현종이 몽탄까지 피신하였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현종의 나주 몽진과 왕건의 나주 원정 때 형성된 몽탄 설화가 섞여지며 위의 설화가 재구성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남해신사는 마한시대부터 있었다

여하튼 설화 내용에 따라 남해포에 사당이 세워진 시기를 현종 이후로 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현종 16년에 남해신사의 격을 높여 사전 체계에 편입하였다고 한 고려사의 기록으로 볼 때, 그 이전에 해신을 모시는 사당이 남해포에 이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 순리이겠다. 특히 꿈에 백발의 수신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도 사당의 존재사실을 의미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해신들을 위한 신당은 부안의 죽막동 경우처럼 이미 주요 항로상에 다수 존재해 있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특히 해상을 통해 낙랑과 왜, 심지어 신라와 대외교역을 활발히 하였던 영산강유역의 마한남부 연맹세력들은 이처럼 해신당 건립에 적극적이었을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 또한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해신들을 위한 치제에 국초부터 많은 공을 들이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후대 왕들에게 남긴 훈요십조에서 알 수 있다.

독립된 사전체계에 독자적으로 편제돼

훈요십조에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은 天靈과 오악·명산대천·龍神 등을 섬기라”라 한 구절에서 ‘용신’을 섬기라는 표현이 그 것이다. 龍神은 水神 혹은 海神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태조 왕건이 해신을 섬기는 것을 강조한 것은 5악, 명산, 대천의 신에 제사지내는 것만 사전에 편성하고 용신을 제외하였던 이전의 통일신라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는 태조 왕건이 해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겠다. 따라서 고려 초에 별도의 사전체계가 미처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팔관회를 통해 해신당의 제의를 적극 후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남해신사는 다른 어느 해신당보다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영산지중해의 중심지에 위치한 남해신사가 마한 이래 해신을 모시는 전통 깊은 사당이라는 역사성이 각인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태조 왕건이 나주 원정 시, 이곳 신당에 와서 무사항해와 본인의 복을 빌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남해신사는 고려 초에도 이전 시기보다 더욱 가장 대표적인 해신당으로 지위를 누리며 팔관회를 통해 국가의 후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한 사당을 나주 몽진 때 직접 참배를 한 현종은 이 사당을 국가의 사전체계에 편입시키려 했다고 본다. 아직 동해나 서해의 해신을 주관하는 별도의 사전은 만들어지지 않고, 다른 산천에 제의를 지낸 사당 역시 별도의 독립된 사전으로 편입되지 않은 상황에서 남해신사만 독립된 사전으로 편입된 것은 남해신사가 갖는 역사적인 의미를 고려왕조가 높이 평가한 것이라 하겠다.<계속>            

글=박해현 박사 @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