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면 몽해리 아천 출신 연합뉴스 뉴스통신진흥회 이사 가나 문화콘텐츠그룹 부회장 전 성균관대 언론정보학원 초빙교수 전 KBS제주방송국 총국장

‘땡그랑 땡그랑’ 한 손에 든 풍경이 울렸다. 이어서 ‘봄날은 간다’라는 구슬픈 노래가 고요한 아침의 정적을 깼다.

2018년 6월 27일 아침 7시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이다. 소리꾼 장사익 선생의 조가(弔歌)가 울려 퍼져 모두가 슬픔 속에 숙연했다. 태극기로 감싼 김종필 전 총리의 관과 위패, 영정이 놓인 식장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놓여 있었다. 장례위원장인 이한동 전 국무총리는 조사에서 “누가 뭐래도 김 총재는 대한민국이 배고프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할 수 있게 한 분이였고 모든 것을 바쳐 산업추진과 정치발전을 시킨 대업 뒤에서 고뇌에도 컸을 것이다”라며 애도했다.

영결식이 끝난 김 전 총리의 영정은 서울 청구동 자택에 도착해 부인 박영옥 여사의 사진이 벽면을 가득 채운 2층 침실을 돌아봤다. 이어서 김 전 총리의 유해는 서울 추모공원에서 화장해 부여 화산면 가족묘에 2015년 먼저 떠난 영세반려 박영옥 여사와 합장되었다. 김 전 총리의 타계로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40여년간 대한민국 정치사의 막이 내렸다.

김 전 총리는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5ㆍ16 군사혁명을 일으켜 대한민국 역사에 등장해 2004년 정계 은퇴까지 43년간 한국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국무총리를 두 번, 헌정사상 최다인 9선의원, 4개 정당의 총재와 대표를 지냈다. 시(詩), 서(書), 화(畵), 음악 등을 즐겨 ‘로맨티스트’란 말도 들었다. 그는 특유의 유머와 ‘촌철살인’으로 우리 정치의 멋과 숨 쉴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김 전 총리는 40여년 동안 정치인으로 살아오면서 해박한 지식과 유머로 인기가 높아 많은 기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김 전 총리는 기자들과 만나 우리나라의 정치의 발전과 인생의 삶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데에는 다른 학자들을 능가했다. 필자는 1989년부터 1992년까지 13대와 14대 국회와 정당을 출입한 약 3년간 국회와 JP가 총재로 있는 신민주공화당을 출입하는 KBS정치부 차장으로 첫 인연을 맺었다. 1961년 JP가 5ㆍ16 주역을 맡았을 때 35세였다.

28년 후, 43세인 필자는 20년 위인 63세의 6선 국회의원과 국무총리, 대통령후보를 거친 거물급 정치인 김종필 총재를 취재했다. 감회가 깊었다. 당시에는 여당인 민정당과 야당인 평민당, 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인 4당 체재였다. 제 4당인 신민주공화당은 KBS만 차장급 1명인 필자와 2진 출입기자 둘이였다. 김 총재는 유달리 기자 경력이 많은 필자만을 선호해 자주 만났다. 이때 김종필 총재의 정치철학과 한국정치에 대한 진단과 미래 전망에 대해 풍부한 기사를 쓸 수 있었다.

김 전 총재는 기자들과 회식 자리에서 “1980년 신군부가 모든 공직을 박탈하고 정치활동을 규제해 1987년 정계복귀까지 7년간 청구동 자택에는 개미 한 마리 드나들지 않았다. 나를 찾으러 왔다가 신군부에 혼이 날까봐 무서워 그런 것이다.”라며 당시 아픔을 자주 털어놓곤 했었다. 김 총재는 청구동 자택 기자 간담회에서 자신의 앞니를 크게 그려 자신을 표현한 신문 만평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자주 드러냈다.

특히 1990년 신문들이 자신이 골프 치는 것을 비판했던 중앙일간지 기자들을 집으로 불렀다. 김 총재는 “나이 일흔이 되어 건강을 위해 골프를 하는데 몸이 아프면 기자들이 대신 아파주겠는가? 내가 공무 중에 평일 골프하는 걸 봤느냐? 휴일에만 내 돈으로 골프하는데 왜 시비를 거는가?”며 진심을 얘기했다. 그 후 김 총재의 골프에 대한 시비 기사가 사라지기도 했다. 김 총재는 2008년 뇌경색을 앓은 뒤 47년간 즐기던 골프를 중단했다. 그 후 2015년 박영옥 여사가 별세한 후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독일에서 특별 주문한 장애인이 치는 골프 카트(Cart)를 이용해 골프를 즐기다 90세가 되면서 한국장애인협회에 이 골프 카트를 기증했다.

김 전 총리는 출입기자들과 한 번 만나면 대부분 평생 동안 이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많은 관심과 정을 주었다. 청구동 김 전 총리의 자택은 해마다 새해가 되면 정치인 못지않게 출입기자가 아닌 많은 언론인들이 찾아가 새해 인사를 드리는 정겨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김 전 총리는 자신을 취재했던 언론인들의 애경사를 꼼꼼히 챙기기도 했다. 승진이나 상을 받거나 자녀들의 대학 입학까지도 보도나 지인을 통해 알면 즉시 축하의 뜻을 보냈다.

필자가 1989년 제 21회 한국기자상을 받은 소식이 전해지자 김 전 총재는 정명목탁(淨鳴木鐸)이라고 쓴 친필 서예작품을 보내주며 ‘맑게 울리는 목탁처럼 바르게 보도를 하라’고 축하와 격려를 해주었다. 또한 1995년 필자가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신문기사를 보고 청구동으로 불러 회중시계를 선물로 주면서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 박사학위의 값어치를 하라”며 축하를 해주기도 했다. 2000년 KBS여수방송국 재직 시 27년만에 다시 국무총리의 자리에 오른 김종필 총재는 전남지방 순시차 광양에 내려와 필자를 불러 함께 자리하기도 했다.

“정치는 허업이다.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자 했다”는 말을 남긴 김종필 전 총리는 이제 허업의 세계를 떠나 자신이 생전에 미리 쓴 묘비가 있는 아내의 곁으로 영원히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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