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촌고분 1호 주인공은 무덤 밖에서 일정기간 장례절차를 거친 다음 무덤에 안치되었음을 설명해준다. 복장 곧 빈장이 마한지역에서도 이루어졌음을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정촌고분의 파리 번데기 껍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왼쪽은 파리 번데기 껍질(정촌리고분), 정촌리 1호분 최초 발견 모습

마한시대 영산강유역 ‘빈장’ 장례

2012년 서울 도봉산 자락에 있었던 도봉서원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중 금강령과 금강저 등 고려시대 불교용구 79점이 나온데 이어, 2017년 도봉서원 터에 대한 추가 발굴조사 과정에서 지금껏 탁본으로만 전해져오던 ‘도봉산영국사혜거국사비’의 일부가 발견되어 학계를 흥분시켰다. 말하자면 고려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번성했던 영국사가 고려말 어느 시점에 이르러 쇠락해졌고, 터만 남은 그곳에 15세기 초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후원하여 잠깐 부활의 조짐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16중엽 폐사되고, 그곳에 1573년 도봉서원이 세워졌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도봉서원의 발굴과정에서 전혀 몰랐던 영국사의 정확한 위치가 드러나면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현전하는 중요한 유적지에 그 이전의 역사의 흔적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유추하게 한다. 앞으로 유적 발굴할 때 참고할 만하다.

모든 고대사가 그러하지만, 특히 기록이 전무하다시피 한 마한역사를 밝히기 위해서는 출토 유적·유물들을 삼국사기 지리지 및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후대의 사서와 일본, 중국 등에 파편으로 남아 있는 기록들과 유기적으로 엮어내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최근 첨단과학 기술을 동원하여 유물의 미세한 부분까지 찾아내고, 인접 학문과 융합연구를 통해 유물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은 고무적인 현상이라 하겠다. ‘다시들’ 정촌고분의 유물 분석에서 시도된 고고학과 법의학 사이에 이루어진 학제간의 융합연구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정촌고분에서 발견된 곤충 껍질

‘다시들’의 정촌고분 1호 석실 내에서 출토된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완벽하고 화려한 형태로 구성된 금동신발은, 이 지역에 강력한 왕국의 존재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주된 근거로 여겨졌다. 그런데 금동신발을 보존 처리하는 과정에서 신발의 서편 바닥과 동편 인골 부위(발뒤꿈치) 쪽에서 십여 개의 파리 유체, 즉 파리 번데기 껍질이 확인되어 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일반적으로 파리가 시신 부패과정에서 생성되는 부패가스에 잘 유인되기 때문에 파리 유체가 무덤에서 발견되는 일은 무덤이 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경우에는 드물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150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이 경과한 후에도 형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 발견되는 사례는 매우 희귀하다.

국내에서는 비단벌레의 날개를 장식 재료로 사용한 천마총의 말안장이나 1973년에 발굴된 경주 계림로 14호묘의 화살통과 같이 인위적으로 제작한 장식품에서 발견된 사례들은 있다. 그러나 당시의 장례절차와 매장과정 등과 관련하여 우연히 매장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곤충의 일부가 발견된 경우는 국내에서는 최초의 사례에 속하여 많은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국립 나주문화재연구소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팀은 2016년 파리 번데기 껍질이 왜 금동신발 뒤꿈치에 묻어 무덤 안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밝히려는 작업을 하였다.

이처럼 고분에서 파리 번데기 껍질이 출토된 사례를 분석하여 그것을 연구한 사례가 일본에서 이미 있었다. 일본 하지이케고분 출토 인골에서 발견된 쉬파리과와 집파리과의 깜장파리속 파리 번데기 껍질을 분석하여 파리가 활동하는 밝은 장소에서 장례절차인 ‘빈(殯)’이 적어도 수일간 행해지고, 일주일을 넘기고 수일이 지나면 장례를 마치고 매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장례를 치를 때까지 8일 밤낮으로 곡하고 슬피 노래를 불렀다는 ‘일본서기’의 구체적인 실증자료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정촌고분 1호 돌방과 같은 조건(빛 차단, 평균 온도 16℃, 습도 90%)에서 파리의 알, 구더기, 번데기 등이 어떤 상태일 때 성충이 되는지를 조사하여 고분에서 출토된 파리 번데기 껍질이 ‘검정뺨금파리(Chrysomyia megacephala)’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현재도 그 파리들이 정촌고분 주변에서 주로 서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난 1500여 년 간 기후가 현재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그러한 추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파리들은 주로 5∼11월(9월경에 가장 활발히 번식)에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것도 확인되었다.

영산강유역 ‘빈장’ 풍습 확인

또한, ‘법곤충의학’을 적용시켜 시체에 있는 곤충의 알 → 구더기 → 번데기 → 성충으로 이어지는 생활상과 사망 후에 경과되는 시간을 산출한 결과 파리가 번데기 상태일 때만 성충이 되고, 알에서 번데기가 되는 데 까지는 평균 6.5일 정도 걸린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파리 알이나 구더기는 고분과 같은 환경 속으로 들어가면 바로 동면 상태로 들어가기 때문에 번데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정촌고분의 출토 금동신발 등에 묻어 있는 파리 번데기 껍질은 피매장자가 사망하고 바로 고분에 매장되지 않고, 파리가 시신에 충분히 접근하고 산란할 수 있는 계절과 장소에서 금동신발을 착용한 상태로 최소 7일 이상 노출된 후, 파리가 시신과 함께 고분 안으로 들어가 매장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말하자면 정촌고분 1호 주인공은, 무덤 밖에서 일정기간 장례절차를 거친 다음 무덤에 안치되었음을 설명해준다. 이를테면 당시 다시들 지역에는 시체를 매장 전에 빈소에 안치하였다가 최소한 7일 정도 지나 장례를 치르는 장제(葬制)가 유행했다는 의미이다. ‘복장’ 곧 ‘빈(殯)’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삼국 이전부터 곳곳에서 행해져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빈장’은 일찍부터 행해졌었다. 지금의 함경도 남부지역에 위치한 옥저에서 ‘골장제’ 또는 ‘가족공동무덤’이라 불리는 장제가 행해졌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한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 장제 모습이 삼국지위지동이전 옥저조에 자세히 실려 있다. 번거롭지만 원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장례 치를 때는 큰 나무로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십여 장이나 되고, 그 윗부분에 출입구를 하나 낸다. ‘새로이 죽은 자는 모두 가매장을 하는데, 겨우 형태만 덮은 후 피부와 살이 썩으면 이내 뼈를 취하여 곽 안에 둔다.’ 집안 모두가 하나의 곽에 공동으로 들어가는데, 나무를 살아있는 형상처럼 깎는다. 죽은 자의 수와 같다.(其葬作大木槨, 長十餘丈, 開一頭作戶. 新死者皆假埋之, 才使覆形, 皮肉盡, 乃取骨置槨中. 擧家皆共一槨, 刻木如生形, 隨死者爲數)” 이처럼 뼈만 따로 추려 항아리에 담아 가족들 유골이 있는 곽에 함께 안치하였기 때문에 ‘골장제’ 또는 ‘가족공동무덤’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필자는 이를 가리켜 오늘날의 가족납골당의 기원(?)이었다고 학생들에게 농담을 하는데, 이러한 골장제가 ‘빈장(殯葬)’을 설명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빈장제가 고구려에서도 행해지고 있었다. 중국 사서인 北史의 기록에, “죽은 사람의 시신을 염하고 실내에 ‘빈(殯)’을 두었다. 3년이 지나면 좋은 날을 골라 장례를 치렀다. 부모나 남편의 상에는 상복을 3년 입었고 형제의 상에는 3개월 입었다”라고 하는 것에서 고구려에서 ‘빈(殯)’이라 불리는 복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신라 역시 같은 북사의 기록에 “사람이 죽으면 관렴(棺斂)을 하고 나서 고분이나 릉을 축조한 후 장례를 치렀다”고 하는 것에서 ‘빈장’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고, 삼국 이전의 부여의 습속에도 “장례 절차를 5개월을 정지시킨 것을 영화로이 알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정상(停喪)’의 의미는 곧 ‘빈장’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빈장’의 구체적인 모습은 백제 무령왕릉 지석을 통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1971년 무령왕릉 발견은 피장자의 신분이 확인된 최초의 삼국시대 왕릉이었다는 점에서 세계 고고학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 묘지석에 따르면, AD 523년 5월 62세의 나이로 사망한 무령왕은 27개월 후인 525년 8월에 유해를 대묘(大墓)에 안치하였고, 526년 11월에 사망한 그 왕비 또한 27개월이 지난 529년 2월에 대묘(大墓)에 안치하였다는 것이다. 곧 무령왕 부부가 27개월간 빈장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복장 또는 가매장 상태로 27개월을 지낸 후 시신을 안치한 장제는 일종의 삼년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신을 묘에 안치한 뒤 삼년상을 치르는 중국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어 보인다.

사소한 흔적도 간과해선 안돼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이전부터 이미 빈장이 행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복장 곧 빈장이 마한지역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정촌고분의 파리 번데기 껍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정촌고분의 유물들이 마한의 사회상을 살피는데 중요한 ‘타임캡슐’이라는 것을 새삼 증명해주고, 고분 연구가 단순히 묘제 형태나 유물의 특성을 분석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해당사회의 특질들을 찾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71년 폭우가 쏟아지는 데도 밤을 세워가며 무리하게 무령왕릉 발굴을 강행하여 고분이 전달하고자 한 많은 흔적들을 놓쳤다. 지금 시종 내동리 쌍무덤 발굴조사가 막 시작되었다. 유형의 출토유물 발견도 중요하지만, 봉분 내부에서 발신하는 수많은 메시지들을 흘려보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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