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서면 구림출생 관세법인 부일 대표관세사

우리나라 서남쪽 남단, 달이 예쁘게 뜬다는 그래서 월출산이란 이름을 가진 명산 중의 명산을 동쪽에 병풍으로 삼고 그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넓은 평야와 강을 끼고 아담하게 자리 한 곳이 구림촌이다.

12동네가 하나의 거대한 단일 촌락을 이루고 있어 호남제일 명촌이라 불리고 있는데 호남 명촌을 넘어 우리나라에서도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든 진정한 명촌을 이룬 곳이 바로 구림촌이다.

구림촌엔 지금 4대 성씨 문중(해주최·낭주최·함양박·창녕조)이 서슬대문 높이 고래등처럼 솟아 우람한 모양으로 서 있는 그야말로 뼈대 있고 가문 있는 혈통의 후손들로 형성되어 있다.    

구림촌은 삼국시대 훨씬 이전부터 형성되었다는 것이 근래에 발굴된 여러 유적과 사료에서 입증되고 백제시대 일본에 학문을 전한 왕인박사와 삼국시대 후기 당나라에 유학 후 우리나라 불교문화를 번창시키고 지금 현존하는 국내 수십·수백여 곳의 사찰을 창건했다는 도선 국사를 배출시킨 곳이 바로 구림촌이다.

우리들 구림초 43회 졸업생들은 6.25전란 다음 다음해인 1955년 입학했었다. 6.25전란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해서 학교건물은 불타 없어지고 초등학교에 입학한다고 물들인 무명베로 만든 교복 아닌 옷에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왼쪽 가슴엔 코 흘리게 용으로 된 거즈 손수건을 달고서 교정에 들어섰다.

당시에는 누런 콧물이 나오면 옷소매로 쓱 닦아 모든 애들의 옷소매는 늘 번들번들할 때였으니까. 교정에 들어섰을 때 교실은 보이지 않고 운동장 구석에 가교사란 유리창도 없는 이상한 초가집 비슷한 기다란 건물이 있었고 교실에는 책상도 의자도 없고 바닥엔 짚 가마니를 몇 장 맨 흙바닥에 깔아놨는데 당시에는 신기하지도 않았고, 모든 학교가 다 그런 줄 생각했을 것이다.

책상도 없이 엎드려 공부한 우리들은 수업이 끝나면 물걸레 바닥 청소가 아닌 깔개 가마니를 밖으로 가지고 가서 거기 붙은 흙을 작대기로 털어 다시 까는 것으로 청소 끝 하는 식이었다. 
물론 화장실도 있을 수 없었고 짚가마니로 지붕 없이 빙 둘러 놓은 임시방편 아닌 반 영구식 화장실 2칸이 전부였고, 당시에 학생 수는 몇 백 명은 되었을 때인데도 그랬었다. 

그래도 까까머리 단발머리 남녀 혼합반인 우리는 공부는 했었고, 3학년 때인가 최신식 조립식 푸세식 화장실 남녀 2칸짜리가 신축되었을 때 신기 아닌 감격했을 정도였었다는 기억이 생생하다. 초등 3학년 때 우리는 월출산 쪽 신근정으로 이사하는데 이사목록 가운데 당연히 최신식 2칸짜리 화장실도 분해 없이 원형 그대로 옮겨가는데  마치 옛 사극에서 보는 신부 가마 옮겨 가듯이 말이다. 

6.25, 4.19, 5.16, 5.18의 역사를 실제 겪어오면서 살아온 구림초 43회, 이미 7순을 넘어 누구는 대머리, 누구는 흰머리, 누구는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지만 우리는 열심히 살아왔고, 지금도 뒷방 신세 아닌 경제현장에서 땀 흘리면서 후회 없이 열심히 땀 흘리면서 살아오고 있다.

서울 거주 구림초 43회는 1970년 무렵부터 매월 정기모임을 50여년 이어오고 있다. 지난 4월에는 10명이 강원 일대를 일주하면서 과거를 회상하고 남은 여생을 후회 없이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담론하였다.

또 다가오는 가을에는 서해안 섬을 찾아 다시 한번 방전되다 시피한 우리 인생 배터리를 충전 하면서 더욱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생을 찾아 동료 후배들에게 손가락질 아닌 부러움의 생을 찾기로 했다. 형옥이, 찬웅이 외 구림초 43회 동창들이여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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