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40>복암리 마한 연맹왕국과 ‘다시들’ 고분군(上)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에서 나온 금동신발을 비롯하여 수많은 유물들은 마한시대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마치 파노라마를 보고 있는 듯하다. 나주 복암리 고분군(사진 왼쪽)과 정촌 고분 모습.

얼마 전 경상도 쪽에서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한 고등학교 친구가 필자의 글을 읽은 소감을 메일로 보내왔다. 그 가운데 일부를 인용해 본다. “오랫동안 잊혀지고, 버려진 역사 그 많은 고분들이 널려 있었지만, 가야와 함께 빛을 보지 못했던 유적과 지역의 역사…근대에 와서는 왜인들이 임나일본부 등의 낭설을 전파시키면서 그 연결고리가 되는 유물이 나와 행여 전라도 해안이나 가야의 역사가 일본의 전진기지임을 증명하는 근거라도 나올까 걱정한 나머지, 한국인들에 의해조차 더욱 무시된 것은 아닌지?…이름하여 5천 년 역사인데, 사라진 고조선 3천 년 역사를 되살려야 하고, 남은 2천 년도 마한, 진한, 변한을 중심으로 복원해야 진정한 한국사가 되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내용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산 복천동, 고령 지산동 등 고대 가야 유적지를 많이 다니며 고대사에 대한 시야를 넓히며 아직 걸음마 단계인 우리 지역 마한사 연구에 깊은 우려를 드러낸 고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고고학적인 유물 및 영세한 문헌기록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여 적어도 6세기 초엽까지는 ‘마한’이라는 정치체가 이 지역에 존재하였다는 것을 실증함으로써 기존 통설을 바로 잡으려 하였다. 이제는 새로운 관점에서 마한사를 서술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집필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수능시험 및 각종 공무원 시험에 4세기 후반 백제의 전라도 경략설이 계속 출제되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이다. 

복암리 아파트형 고분,
지역 정치체의 실체를 확인해줘


1996년 ‘아파트형 고분’이 발견되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을 흥분시켰던 복암리 3호분을 비롯한 여러 고분들이 새롭게 발굴 조사되면서 나주 복암리 지역이 영산강 고대문화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이 새삼 부각되었다. 2005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세워지고, ‘고분전시관’까지 세워지게 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 기관들은 국립나주박물관과 더불어 영산강 유역의 고대사를 밝히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2017년 9월 복암리 고분 전시관에서는 ‘마한의 귀족 여인’이라는 주제의 이색적인 전시행사가 있었다. 2005년 영동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고(古)인골 가운데 비교적 형태가 온전한 남성, 여성, 어린이 등 3명을 디지털 홀로그램으로 복원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 바 있다. 그리고 복암리 3호분과 이웃한 정촌 고분에서는 금동신발을 비롯하여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수장층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기도 하였다.

복암리 일대는 이처럼 의미 있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고분들이 많다. 이 가운데 시종·반남 일대의 대형고분들과 비교될 정도로 규모가 30m~40m에 달하는 대형고분들이 많아 당시 이 지역이 영산지중해 대국을 이룬 ‘내비리국’ 수준의 연맹체를 형성하였을 가능성을 높여 준다. 특히 정촌·복암리 고분에서 나온 금동신발을 비롯하여 수많은 유물들은 마한시대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마치 파노라마를 보고 있는 듯하다.

영산강 본류와 문평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다시들’이라는 넓은 충적 평야가 형성되어 있는 곳에 복암리 고분군이 있다. 이곳은 벼농사가 일찍 시작되어 농업 생산력이 어느 지역보다 높았던 가흥리 유적과도 인접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커다란 정치체를 형성하는 데 유리한 입장이었다. 게다가 노령산맥 이남의 내륙 지역과 서남해안 지역을 영산강을 이용한 수로로 연결할 수 있는 교통로상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문물이 교류하는 중심지 역할도 하여 새로운 문물유입이 빨랐을 것이다.

잠애산과 학마산 사이의 시랑골 및 탁마산 서쪽 강암, 중동 마을을 중심으로 많이 분포된 지석묘들은 이 지역이 이미 청동기 시대에 상당한 수준의 읍락을 형성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통일신라 유적으로 알려져 있는 거마산 능선상에 있는 회진성과 복암리 3호분 분구사면에 조성된 기와 가마터 또한 삼국시대 이후까지도 이곳이 영산강유역의 거점이었음을 말해준다.

복암리 일대가 주목을 끈 것은 1996년 봉분이 일곱이 있다하여 촌로들 사이에 ‘칠조산(七造山)’이라고 불리었던 곳에 남아 있는 4개의 고분이 확인되면서 부터였다. 3개 고분은 1970년대 경지정리 때 이미 봉분은 삭평되고 없는 상태였다. 4개의 고분이 모두 대형고분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 지역의 정치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3호분은 그 형태가 평면 네모꼴로 동변 약 30m, 서변 42m, 남변 39m, 북변 32m, 최고 높이는 약 6m로 다른 봉분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는 점에서, 그리고 도굴로 파헤쳐진 함평 신덕고분이나 광주 월계동 고분, 해남 조산 고분 등과 달리 3호분은, 문중 소유의 선산이어서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어 있어 더욱 관심을 끌었다. 96호 석실 내부에서 4기의 옹관과 함께 금동신발, 장식대도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복암리 3호분은 토착 정치세력 존재 확인

봉분에서 옹관묘 22기, 수혈식 석곽묘 3기, 횡혈식 석실분 11기, 황구식 석곽묘 1기, 횡구식 석실묘 2기, 석곽옹관묘 1기, 목관묘 1기 등이 확인되었다. 즉, 목관묘-옹관묘-석곽옹관묘-수혈식석곽묘-횡구식석곽묘-횡혈식석곽묘 순으로 시기를 달리하는 묘제가 차례대로 조영되어 있었다. ‘아파트형 고분군’이라고 명명한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와 같이 한 봉분 안에서 이렇게 양식을 달리하는 고분들이 순차적으로 조영되어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를 두고 영산강유역의 대표적인 분구묘의 특징에 해당하는 가족묘와 더불어 추가장에 따른 다장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이를테면 복암리 3호분의 한 옹관에서 함께 출토된 2인의 인골이 모계가 같은 친족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한 봉분에서 수세기에 걸쳐 형식을 달리하는 고분이 계속 조영되었던 것은 단순히 가족묘의 특징으로만 볼 수 없게 한다. 여러 시기의 다양한 고분이 조영되는 과정에서도 영산강유역의 전형적인 묘제인 옹관묘 중심의 다장 풍습이 유지되고 있는 것에서 견고한 토착성을 느낀다. 3호분을 포함하여 나머지 고분들의 거대한 봉분 규모와 무려 26기나 되는 3m 넘는 대형옹관 및 금동신발, 장식대도, 은제관식 등 출토 유물들은 이 고분 피장자가 강력한 수장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대를 이어 이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한 토착세력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복암리 고분보다 약간 늦게 발견된 ‘정촌 고분’ 또한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복암리 3호분이 있는 ‘칠조산’과 불과 600m 가량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잠애산 산비탈부에 조영되어 있는 ‘정촌 고분’은 복암리 3호분과 반남 신촌리 9호분과 같은 방형분이라는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 고분은 한 변이 30m 내외로 복암리나 신촌리 고분과 크기가 비슷한데다 출토된 금동신발 및 토기 등 부장품 또한 엄청난 양이어서 피장자가 연맹체의 수장층이었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준다.

독자적 정치체 형성한 마한 연맹체

 

이를 통해 복암리 3호분과 정촌고분이 있는 ‘다시들’ 지역에 강고한 마한의 정치체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들은 다른 영산강유역 정치체들처럼 독자적 정치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앞서 지적한 바 있듯이, 영산강식 토기들이 반남리식, 복암리식, 월계동식 등으로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이러한 사정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복암리 일대에 영산강 중류지역을 대표하는 마한 남부연맹을 구성하는 또 다른 대국이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임영진 교수가 복암리 일대와 함평 월야지역을 포함하여 하나의 마한 정치체가 형성되었다고 보는데 대해 동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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