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송 북한농촌 방문기<3>
북한 실상을 알고 투자와 함께 평화통일 노력해야

천덕리 농촌 신축부락 방문

묘향산관광

일명 태백산(太白山 또는 太佰山) 혹은 향산(香山)이라고도 한다. 묘향(妙香)은 불교용어로 기향(奇香)을 말하는데, 이것은 《증일아함경 增一阿含經》에 나오는 말이다. 묘향에는 다문향(多聞香)·계향(戒香)·시향(施香) 3종이 있으며, 이것은 역풍·순풍이 불 때 반대 방향에도 냄새를 풍기는 수묘(殊妙)한 향기를 말한다.

이 산에는 향목·동청(冬靑) 등 향기로운 나무가 많아 고려시대 이전부터 묘향산이라 지칭하였다. 태백산에서 ‘백(佰·白)’자의 유래는 광명(光明)·양명(陽明)을 뜻하는 ‘imagefont’자에서 나왔으며, 이 산은 백두산의 장백산맥 줄기가 남으로 낭림산맥으로 내려와 서남쪽으로 달리는 묘향산맥의 주봉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우리 조상의 신앙적인 대상으로 숭배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기 (古記)』에 옛날 환인(桓因)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 환웅(桓雄)이 인간 세상에 뜻을 둔 것을 알고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인간 세상에 내려가 다스리게 하니 환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神壇樹) 아래 내려왔다고 하였는 바, 일연(一然)은 이때의 태백산을 묘향산으로 비정하였다.

이로 볼 때 늦어도 고려 중기 이후 묘향산이 단군 신앙과 결부되어 우리 민족의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행인국(荇人國)이 태백산의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바, 고전(古典)에는 이 태백산이 묘향산으로 추정되어 왔다.

묘향산은 그 산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찰을 가졌던 것으로 유명하다. 묘향산에는 360여 암자가 있었던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화생(化生)하였다는 단군굴이 있다.

묘향산 지하궁전

묘향산에서 대표적인 관광지가 지하궁전이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국제친선전람관은 북한 측 얘기로는 김일성 부자가 외국으로부터 받은 선물들을 전시할 목적으로 세운 건축물로, 1호관은 연건평 5만여 평에 전부 지하 6층의 규모로 건축하여, 1978년에 개관을 했으며, 김정일 관인 2호관은 2만여 평 규모로 1989년에 개관을 했다고 한다.

두 건물 모두 높은 산줄기 바로 아래에 입구 부분만 한옥 건물 형태로 만들고 나머지는 산을 파서 지하에 만들어 놓았는데, 산속으로 만들어 놓은 시설물의 거대한 규모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건물 속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높이가 4m 정도에 두께는 10cm 정도의 거대한 두 쪽의 철문으로 되어 있었고, 문 양쪽을 완전무장한 두 사람의 군인이 지키고 있었다. 관람객은 문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두꺼운 천으로 만든 덧신을 받아 신발에 덧씌우고, 카메라를 포함한 일체의 짐은 보관소에 맡겨야만 했다. 전시물의 보존을 위해 사진촬영을 금지한다고 했다.

전시물 중 김필주 박사 부부가 기증한 비단이불도 보이고 한국의 어떤 농협조합장이 기증한 장수곱돌 솥도 있었다.

그들은 김일성이 외국정부로부터 받은 훈장을 첫 번째 홀에 별도로 전시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그에게 훈장을 수여한 나라는 라오스, 캄보디아, 적도기니, 큐바 등이다.

보현사[普賢寺]

전시관 옆에 보현사 절이 있다. 당초는 연주 현 씨들이 가까운 곳에 많이 살았고 시주도 많이 해서인지 검을 현(玄)을 써서 보현사(普玄寺)였다고 들었다.

묘향산에 있는 고려시대의 사찰을 말한다.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40호로 지정되었다. 968년(고려 광종 19)에 창건되었고, 한국 5대 사찰의 하나로 꼽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1042년에 중건한 후 여러 차례의 화재로 보수·중건되었다.

오늘의 보현사는 남북 중심축을 따라 조계문, 해탈문, 천왕문을 지나면 9층탑(북한 국보문화유물 제7호), 만세루, 8각13층탑(북한 국보문화유물 제144호), 대웅전이 차례로 놓여 있다.

원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수월당, 명부전, 응향각이 있고 오른쪽에 요사채인 심검당, 관음전, 만수각 외에 대장전과 영산전(북한 국보 141)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대웅전·만세루·심검당·수월당 등 여러 채의 건물들이 6·25전쟁 때 훼손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대웅전과 만세루는 각각 1976년과 1979년에 복원된 것이다. 산문의 첫 번째 문에 해당되는 조계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현사비(북한 국보 149)를 비롯한 여러 석비가 세워져 있다.

절 앞으로 넓은 개울이 흐르고, 개울 건너에는 안산에 해당되는 봉우리가 있다. 일제강점기의 31본산 중 하나로, 주변 경치가 아름답고 건축술이 뛰어난 사찰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휴정(休靜)이 입적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보현사의 주불전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다포계 팔작지붕 형태의 건물이다. 건물은 규모가 웅장하면서도 부재구성이 치밀하고 정교하며, 거기에 맞게 모로단청이 매우 우아하면서도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특히 대웅전 전면 앞문에 새긴 연꽃줄기와 무궁화, 용 등의 투각 꽃창살 조각은 문양이 매우 정교하고 세련되었다. 한 때 보광전이라고 불렸던 대웅전에는 현재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여래와 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닫집은 ‘亞’자형의 중층으로 화려하며, 천정은 빗천정과 우물천정을 같이 한 조합천정의 형식이다.

송별식

묘향산 관광 후 평양으로 돌아와 보통강호텔에서 연회장에서 개최되는 송별식에 참석했다.  일반인이 미리 모두 참석해 있고 VIP는 다른 방에 있다가 송별식 홀 중앙을 통해 박수를 받으면 남북의 귀빈이 함께 입장해서 착석했다. 마침 내 자리 옆에는 남북경제회담 시 서울에도 온 적이 있는 김 씨가 앉았다. 내가 한국 농협의 고위직임을 알고서 남한에 젖을 짜는 양이 있지 않느냐 면서 좀 보내줄 수 있느냐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옛날에는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젖소가 들어오면서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귀국해서 알아보겠다고 답변했다. 홍 목사도 함께 들었었으나 모른 체 했다. 그 후 귀국하는 항공기에서 옆 좌석에 앉은 홍 목사에게  젖을 짜는 양 문제에 대한 나의 고민을 이야기 했더니 그런 것은 잊어버려도 된다는 말씀이었다.

남북나눔의 필요성

학산면 광암마을 生 전 농협중앙회 신용대표이사 전 농민신문사 사장 한·일농업농촌문화연구소 공동대표

홍목사님으로 부터 남북나눔의 필요성 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다음과 같다.

“천덕리 농촌시범마을 조성사업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많다. 북한 농촌 주민의 삶 수준을 높여 주어 잘사는 마을을 시범적으로 만드는 일에 지속적으로 기여한다면 그 마을은 북한 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남쪽에서 만들어 준 것이라는 소문이 날 것이고 이는 남북화해와 통일에 밑거름이 될 것이다. 지금 400채로 멈춰진 상태인데 앞으로 400채를 마저 완성하고 거기다 조림사업 등을 더한다면 북한의 농가에게 희망을 주게 될 것으로 믿는다.”

캐나다 출신의 북한 주재 유엔 직원의 아내는 캐나다로 돌아가기 전 서울에 와서 홍 목사에게 이런 증언을 했다.

“유럽의사회와 평양 주재 의료 NGO가 북한 아이들의 영양 상태를 조사한 바 절대영양결핍  지수가 16.8%로 나왔다. 절대영양결핍 지수는 생명에 지장이 있는 수치를 말한다. 아프리카 소말리아와 르완다, 에티오피아의 내전 중 죽은 아이들의 절대영양결핍 지수가 12%이었다. 아이들의 장기가 생후 24개월 만에 다 형성이 되는데 이때 영양이 결핍되면 키가 자라지 않게 된다.

게다가 24개월 동안 뇌의 95%가 자라는데 이때 영양이 결핍되면 치명적인 정신장애가 생긴다. 남한과 북한을 다녀 보면 남북의 인종이 서로 달라지고 있다. 땅덩어리만 갈라진 게 아니라, 이미 겉모습도 남과 북이 서로 달라지고 있는데, 이게 비극이 아니고 무엇인가? 적어도 한민족의 반쪽 아이들 상당수가 정신지체로 성장하는 이런 저주는 한국교회가 막아야 한다 ”
이 외국인 여성의 눈물을 흘리면서 절박하게 호소하는 말이 그의 뇌리와 심장에 박혔다고 기록하고 있다.(화해와 평화의 좁은 길 책 중)

북의 실상을 알고서도 화해와 평화, 통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저들을 껴안고 10년 20년 씨름하다 보면 가능하다. 통일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네 가지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첫째, 북한 동포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둘째, 북의 어린이들을 위한 투자를 계속 해나가야 한다.

셋째, 남북교류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

넷째, 중립지대로서 피난처가 마련돼야 한다.

자유가 없으면 삼무(三無) 즉 세 가지가 없다. 첫째, 창의력이 생기지 않는다. 남이 하라는 것 밖에는 못하는 것이다. 둘째, 자발성이 생기지 않는다. 셋째, 책임 의식이 없어진다. 이것이 자유의 장점이고 핵심이다. 그래서 자유가 없는 사회주의 국가가 멸망하는 이유다. 자유가 없는 북한 땅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탈북 이주민들도 이런 3무의 습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자기보호 본능이 굉장히 강하다. 그런 그들을 사랑하는 것 말고는 그들을 변화시킬 다른 방법은 없다. 즉 그들이 자발성과 책임의식을 배우고 익혀서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내하면서 도울 필요가 있다.

3박4일의 짧은 북한 여행이지만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같은 민족, 같은 나라가 왜 이렇게 가장 먼 나라, 가장 적대적인 나라가 되었을까?  다시 같은 민족으로 오가며 살 수는 없을까?
우리 때문인지? 누구 때문인지? 알 수도 없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한다. 같은 문화를 5천년 동안 향유하면서 살아온 금수강산 아닌가? 장구한 역사 속에서 생각하면 수많은 국난도 외침도 있었지만 독립국가를 이루었기 때문에 지금의 이런 분단상태는 일시적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극단적인 것은 서로 조심하고 상호이해와 포용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기를 기도한다.

서로 조금씩 이해하고 나눕시다. 우리의 영적, 물질적 자산을 북녘동포와 나누고 공유하는 것은 단순한 물자 지원이 아니라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에 한국 기독교 진보와 보수 교단이 힘을 모아 1993년 남북 나눔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동·서독의 통일 과정을 보더라도 서독 측의 포용과 아량과 이해가 먼저고, 동독 측의 수용이 있었기에 서로 나누는 것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민족이 독일민족 보다 더 우수하다. 먼저 서로 모든 것을 물질이든 생각이든 사랑이든 나눕시다.

북한의 영국주재 태영호 공사는 “북쪽에서 통일이 주체는 김정은 정권이 아니라 주민들입니다. 그들이 북과 남의 삶을 비교하고 남쪽의 삶을 선택하도록 하면 통일은 금방 옵니다.”고 했다. 우리는 현재 한국에 들어와 있는 몇 만 명의 탈북민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곰곰 생각해 보았다. 지금부터라도 이 문제를 갖고 온 국민의 기도 운동이 일어나기를 기원하는 마음뿐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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