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22>고대일본 불교사상에 영향을 준 행기스님(上)

동대사. 일본 나라(柰良)시에 있는 동대사(東大寺) 전경. 743년에 세워진 이 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왕인의 후예로 알려진 행기스님의 족적이 남겨져 있다. 아래는 나라역 앞에 세워진 행기스님의 동상과 대수혜원 안내판.

동대사에 남겨진 행기스님 족적

우리나라 경주와 자매결연 도시인 일본 나라(柰良)시에 일본 화엄종 본찰 도다이지(東大寺)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이 사찰은 많은 사슴들이 평화롭게 놀고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743년에 세워진 이 절은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인 본당과 한국의 교과서에도 소개된 역시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높이 16m의 청동 비로자나불 대불(大佛) 등 일본 국보급 문화재들이 많아 불국사처럼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701년 ‘대보율령’을 완성하며 율령국가체제를 정비하였던 일본은 ‘나라(柰良)시대’를 열었다. 최초의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잇달아 편찬되었던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치열한 권력다툼과 흉년, 천연두 유행 등으로 ‘혼란과 격동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때 즉위한 쇼무천왕은 불교를 통해 체제 안정을 꾀하려 하였다. 동대사 건립과 비로자나불 대불 조영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728년 태어나자마자 요절한 태자를 위해 금종산사(金鍾山寺)를 세운 쇼무천왕은, 743년에 국가재해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금광명최승왕경’을 구현할 대불 조영사업을 시작하였다. 745년에 금종사에 대불을 안치할 사찰 공사를 시작하며 ‘동대사’라 개칭하였다.

이들 사업은 율령 정부 힘만으로 사실상 불가능함을 깨달은 쇼무천왕의 간청으로 대승정을 맡은 행기 스님이 동원한 도래인과 일반 서민들의 역량이 결집되어 이루어졌다. 행기 스님이 이 대불 조영의 책임을 맡았던 것이다. 동대사에 ‘행기당’이라는 건물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일본고대 불교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 우리지역 영산지중해 출신 왕인박사 후손이었다는 점은 우리가 관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복전사상을 실천한 행기스님

 

행기는 ‘일본서기’에 “스님이 마을을 지나면 어린이들까지 나와 ‘행기 보살이 왔다’라고 박수치며 환영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하층 민중들에게 가히 절대적인 추앙의 대상이었다. 특히 그가 입적하자 당시 쇼무천왕이 내린 조칙에 “매우 존경하는 스님께서 친히 제자들을 거느리고 중요한 곳에 다리를 만들고 보를 쌓는다는 소문이 나면 인근 백성들이 달려와 힘을 보태어 며칠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지금 백성들이 모두 그 이익을 보고 있으니 ‘행기보살’이라 불렀습니다”라 했는데, 승속일체(僧俗一體)를 추구했던 스님의 면모를 엿보게 한다.

스님의 업적에 대해 일본역사 교과서는 “한편으로, 불교는 정부로부터 혹독한 통제를 받아 일반적으로 승려의 활동도 사원 안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행기처럼 민중들에게 포교와 더불어 용수시설ㆍ구제시설을 만드는 등 사회사업을 하여 국가로부터 간섭을 받으면서도 많은 지지를 받은 승려도 있었다.(*각주: 그 후 행기는 대승정으로 취임하여 대불의 조영에 협력 하였다. 사회사업은 선행을 쌓은 일에서부터 복덕을 일으킨 불교사상에 기초하고 있으며, 광명황후가 평경성에 비전원을 설치하여 고아나 아픈 사람들을 수용하고, 시약원을 만들어 의료사업을 한 것도 불교신앙과 관계가 있다.)(山川出版社,『詳說 日本史』)”라고 상세히 서술하였다.

일본 곳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관련연구 논문만 1천여 편이 넘을 정도로 일본고대 불교에서 차지하는 그의 불교사적 위치는 우리나라 대중 불교를 대표한 원효 스님처럼 대단한 평가를 받고 있다. 이렇게 도래인 후예로서 일본에서 높은 존경을 받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이렇다 할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도래인을 다룬 우리 교과서에 스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어 일반 대중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묘지명에 적힌 왕인의 후예

일본말로 ‘교키(ぎょうき)’라고 불렸던 스님은 668년 도래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일본의 가와찌(하내)국 오오토리군에서 태어나 749년 82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스님 사후 480여년 만인 1235년 신도들이 죽림사에 있는 그의 묘지를 발굴하였을 때 발견된 사리병기에 “스님은 약사사 사문이며 속성은 高志氏(고지씨)이다. 원래 출신은 백제 왕자 왕이의 후예이다.(本出於百濟王子王爾之後焉) 그 모친은 봉전(蜂田)씨로 가와찌국 오오토리군에 사는 봉전수호신의 장녀였다.”라고 자세한 기록이 있어 출신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비명은 스님이 입적할 때 시종했던 진성 스님이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사료로써 신빙성이 높다. 스님이 “백제 왕자 ‘왕이’의 후예”라는 구절이 주목되는데, ‘왕이’는 일본식 발음 ‘와니(わに)’로 음독되기 때문에 역시 ‘와니’로 독음된 왕인과 동일 인물로 생각되고 있다. 말하자면 행기스님은 왕인박사의 후예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역사 교과서에는 이러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일본에서 행기 연구를 최초로 본격적으로 하였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薰)는 처음에는 행기를 백제 왕족과 연계하여 설명하였으나 뒷날에는 아무런 설명 없이 중국 한족 계열로 바꾸어놓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행기스님이 한반도계라고 하는 사실을 가급적 숨기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필자는 앞서 박사 왕인이 영산지중해 유역 출신으로 5세기 전후에 왜에 건너간 인물이라는 사실을 실증한 바 있다. 그런데 이렇듯 왕인을 백제 왕족이라고 한 것은 8세기 들어 난파의 백제군 지역 백제 왕씨와 가와찌국 고시군(古市郡)·단비군(丹比郡)지역 왕인 후손들이 서로 필요에 따라 결합하면서 형성되었다는 대진대 나행주 교수의 의견은 일리 있어 보인다. 말하자면 백제 왕씨는 당시 불교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행기를 백제 왕족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을 것이라는 교원대 김은숙 교수의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동족들 중생구제에 나서

스님이 왕인의 후예라는 사실은, 성씨인 ‘高志’가 왕인 후예 씨족이었고, 행기의 부모가 살았던 하내 지역에 왕인 후예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행기의 모친 가계 또한 백제계 도래인 출신이라고 하는데 어쩌면 같은 영산지중해 출신일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도래인, 그 중에서도 영산강유역 출신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하내 지역에서 도래인 선조를 부모로 둔 행기는 누구보다 모국에 대한 정체성을 간직하며 성장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일본 사상계의 비조 역할을 하였던 왕인박사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스님이 가졌던 자부심은 남달랐을 것이다.

그가 이러한 의식을 가졌다는 것은 출가직후 ‘대수혜원(大須惠院)’이라는 숙박 기능이 가능한 사원을 세운데서 알 수 있다. 현재도 ‘고장사(高藏寺)’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데, 이러한 ‘원’을 세웠던 까닭을 ‘대수혜원’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다. 그 명칭은 ‘須惠(수혜) 즉 陶(도)’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지역이 일본의 유명한 경질토기 유적인 陶邑(수에무라) 도요지 근처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도요지는 5세기부터 한반도에서 이주한 이주민들, 특히 영산지중해 출신 도래인들이 새로운 경질 수에끼 토기들을 생산하였던 대표적인 곳이었다.

행기스님은 이곳 도요지에서 일하는 많은 도래인 후예들이 거처도 없이 힘들게 생활하는 것을 보며 동족의식을 느꼈을 법하다. 그래서 그는 숙소를 지어 그들에게 휴식공간을 만들어주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후술하겠지만 그가 수많은 ‘布施屋(보시옥)’과 ‘院(원)’을 만들며 중생구제를 본격적으로 실천하며 민중에게 다가갔던 계기가 이처럼 영산지중해 도래인들과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의 내면에 흐르는 영산지중해 출신이라는 정체성이 도래인 후예들에 대한 연민과 결합되어 나타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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