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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발한 무역의 거점, 영산 지중해

기사승인 2017.10.13  13: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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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2>한·일 교류의 상징, 시종 태간리 전방후원형 고분(中)

광주 월계동 장고분

엊그제 중추 연휴 때 TV를 켜니 인기가수 하춘화가 ‘영암 아리랑’을 한 곡조 읊은 것을 보며 자막에 나오는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을 유심히 음미해 보았다. 아마도 영암지역의 고대사에 대한 필자의 관심의 일면이라 생각되었다.
 
한·일 고대사의 비밀 열쇠를풀어줄 태간리 고분
1987년 우리 영암 시종 태간리에서 일본의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과 비슷한 형태를 가진 고분이 발견되어 한·일 고대사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는 물론 일찍이 임나일본부를 주장하고 식민 지배를 하였던 경험이 있는 일본인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전방후원형 고분 가운데 가장 일찍 발견된 이 고분은 1991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1년과 2015년 매장 문화재 전문조사 기관인 대산문화연구원 등에서 무려 세 차례나 발굴조사를 연이어 하였다. 이와 같이 한 고분을 여러 차례 조사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이 고분이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고분을 처음 조사한 한국학중앙연구원 강인구 교수는 4세기 무렵에 조영되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는데, 최근 정밀 발굴한 결과 석실에서 출토된 개배, 주구에서 출토된 사발 등으로 볼 때 6세기 초에 조영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새롭게 나오고 있다. 이 고분은 원형 봉분과 방형 봉분이 동시에 조영된 광주 명화동 고분이나 함평 신덕 고분과는 달리 일본 오쓰시의 후타고야마 고분, 오사카부의 쿠라츠카 고분처럼 원형이 축조된 다음 이에 덧붙여 앞쪽의 방형 봉분을 완성한 것이라고 조사되고 있는데, 이 점이 축조시기를 둘러싼 논란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을까 기대된다.
 
임나일본부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편 자라봉 고분에 이어 1992년 광주 명화동 고분이 발견되어 이듬해인 1993년, 1994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되었는데 원통 모양의 토기인 ‘하니와’ 1점이 출토되어 한·일 역사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당시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이 고분에서 출토된 하니와는 당시 한반도 남부와 일본과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말해주는 1급 유물로, 이 고분은 한반도에 정착하고 있던 왜 호족이 묻힌 곳일지도 모른다”고 흥분하였다. 이렇듯 일본 언론이 흥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왕후의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는 증거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광주 월계동 등 영산강 유역에서 전방후원형 고분이 잇달아 발견되자 전남지역이 ‘임나일본부’ 관할 아래 있었다는 일부 일본 학자들의 주장과 관련하여 일본에서 큰 관심을 가졌지만, 한국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와 관련되는 것을 우려하여 전방후원분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오히려 한반도에서 넘어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전방후원형 고분 문제는 한·일 양국 사이의 현재적 상황과 관련하여 뜨거운 감자가 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전방후원형 고분은 일본에서 3세기 후반에 나타나 6세기까지 유행하였던 고분이고, 영산강 유역의 고분도 형태와 출토 유물 등에서 그것과 유사한 측면도 적지 않다. 말하자면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의 출현은 어디까지나 두 지역의 문물교류의 산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을 조선반도 정복설의 근거로 삼거나, 반대로 일본의 억측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역사적 실상과 동떨어진 해석을 하는 것 모두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본 열도에 형성된 독자적인 영산 지중해 문화
 

대선릉(일본 오사카)

최근 일본에서 발굴·조사된 유적과 유물에서 영산강 유역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는 것은 한 ·일 양국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이를테면 니시신마치(西新町)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들, 이른바 평행 타날문 토기를 비롯하여 이중구연호, 양이부호 등이 영산강식 토기였다. 물론 장란형 토기나 주구 토기처럼 또 다른 영산강 유역의 주요한 기종들은 출토되지 않고 있어, 당시 왜가 토기 기종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은 있지만 이 지역의 주요 토기들이 일본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영산강 유역 토기 편년에 대해 학자들 간에 견해 차이가 있기는 하나 대체로 3세기 중엽∼4세기 중엽으로 살피고 있다.

 또한 니시신마치 유적에서 출토된 부뚜막 역시 영산강 유역과 비슷한 장방형의 평면 형태를 띠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말(馬)뼈가 원형 그대로 출토된 시토미야키타(蔀屋北) 유적에서 발굴된 U자형 부뚜막 또한 전라도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이처럼 近畿 지역에서 출토되는 한반도계 유물 가운데 영산강 유역과 관련이 깊은 유물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영산강 유역 문화가 이 지역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게 한다. 반면 백제 중심지 유물은 거의 출토되지 않은 점이 특이한데, 이는 당시 백제와 왜의 교류가 영산강 유역 연맹 왕국에 밀려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을 반영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영산강 유역에 보이는 왜 문화
 

신촌리9호분 툴토 하니와

영산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들 가운데 왜계 요소가 적지 않게 보이고 있다. 국보 295호로 지정되어 더 유명해진 반남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누차 언급하였듯이, 보주가 달린 3단의 가지 장식에서 가야계 요소와 더불어 왜계 요소도 있다는 것을 살필 수 있다. 같은 신촌리 9호분 분정 가장자리에서 1점, 분구 사면 성토층에서 31점이 50~100㎝ 간격으로 배치된 상태로 출토된 원통형 토기인 ‘하니와’는 재지적인 특징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왜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영산강 유역에서 왜계 요소가 보이고, 일본에도 영산강 지역 문화 요소가 보이는 것은 두 지역의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말해준다. 영산 지중해 연안의 남해만 일대에 아직도 남아 있는 수문포·당두포·배나루 등의 고대 지명을 통해 그곳 포구들이 과거 마한 연맹 왕국 시절 대외교역 중심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대 중국에서 사용되었던 점술인 ‘복골’ 유물이 남해만의 수문 패총과 함께 해남 군곡리 패총, 광주 신창동 유적 등 영산강 유역 곳곳에서 출토되고 있다. 해남 군곡리가 낙랑과 가야를 연결하는 중계 무역 중심지였다면, 영산강 내해인 내동천 유역과 수문포 등 삼포강 유역의 여러 포구들이 영산강 뱃길로 영산강 중·상류 즉 광주 신창동 일대까지 연결해주는 관문 역할을 한 셈이다.

여하튼 4세기 후반 오사카 분지를 중심으로 야마토 왕권을 성립시켰던 왜 왕조와 영산강 유역의 '내비리국' 등이 인적, 물적 교류를 활발히 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별고로 다룰 예정이지만, 영암 상대포에서 출발했다는 왕인박사 일행의 도왜(渡倭)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영산강 유역의 연맹왕국들은 주변국과 활발한 문물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재지 세력의 힘을 과시한 영산 지중해 세력의 대형 고분 축조
시종·반남 일대의 거대한 옹관고분도 교류를 통해 가야나 왜의 거대 고분의 실상을 알게 된 내비리국 등 영산강 유역의 재지 세력들이 그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조영한 것이었다. 실제 ‘大王墓’라 불리는 거대 전방후원분들이 밀집되어 있는 百舌鳥·古市고분군이 있는 곳이 중국 대륙과 조선반도로부터 들어오는 입구인 오사카만과 정치 중심지인 나라 분지 사이에 있는 것으로 보아 외국 사신들에게 왜 왕조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거대 고분을 축조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영산강 유역의 연맹체들도 그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신촌리  9호분 같은 고총(高塚)의 옹관고분을 조영하였고, 일본의 거대 고총인 ‘전방후원분’에 주목을 하였던 것은 아닌가 한다.

결국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은 왜와의 교류를 통해 일본에서도 연맹 수장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조영됐다는 것을 이해한 영산강 유역의 정치 세력들이 그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조영한 것이라 여겨진다. 원분의 형태로는 거대 고분을 조영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외형적으로 왜와 비슷하다고 하나 독자적인 내부 석실 양식을 채택하고, 분주 토기 또한 재지적인 성격이 드러난 것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이 지역의 문화 역량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전방후원형 고분이 倭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재지 세력들이 그들의 입장에서 변용하여 채택한 것이라 여겨진다.
 

박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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