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9>영암지역에 웅거한 영산지중해의 소국, 일난국

마한역사의 중심지로, 대형고분 등이 산재 해 있는 시종면 마한공원 일원

마한역사의 중심, ‘영암’을 찾아보다

시종면 일원에서 9월 23일과 24일 이틀 동안 마한축제가 열린다. 축제를 통해 마한의 역사를 되살려 보려는 영암군의 열정이 엿보인다. 다만, 이러한 축제 등을 통해 마한의 역사를 실증할 수 있는 학술세미나도 병행되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이러한 축제가 열린다는 것은 영암지역이 마한역사의 중심지였다고 하는 사실을 인식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영암신문’ 지면을 통하여 영산강유역의 고대사를 추적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지면의 특성상 영암지역의 역사를 먼저 살피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한다.
 
영산 지중해의 소국 ‘일난국’

영암에 있는 마한 소국의 구체적인 실체를 잘 알지 모른다. 천관우 선생께서 일찍이 언어학적으로 마한 소국의 하나인 ‘一難’을 영암지역에 비정하였다. 그는 ‘일난’의 옛 음 iet-nan이 영암의 옛 이름인 ‘月奈’의 음 ngiwdt-nai와 비슷한 것으로 추측하여 영암지역에 ‘일난국’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천관우 선생의 추론 위에 목포대 이영문 교수는 지석묘 밀집 분포지가 있는 영암 덕진, 신북, 군서, 서호, 학산, 미암면 일대가 ‘일난국’의 영역이 아니었을까 추론하였다. 필자는 앞서 내비리국을 다룰 때 영암 시종 일대는 일난국의 영역과는 별도의 연맹체를 형성하였다가 시종천 건너 반남지역의 연맹체와 통합의 과정을 밟아 간 것으로 파악한 바 있다. 결국 영암지역에는 시종천을 중심으로 반남지역과 연맹을 결성한 ‘내비리국’ 영역과 영암천을 중심으로 나머지 지역을 아우르는 소국인 ‘일난국’ 등 두 개의 연맹왕국이 존립해 있었다.

한편 영암군청 홈페이지에는 마한 소국으로 ‘월지국’이 이곳에 있었다고 하여 위에서 살핀 것과는 다른 의견이 설명되어 있다. 아마도 백제 때 이 지역이 ‘월나군’이었다고 하는데서 착안하여 ‘월’자라는 동음어에 기준을 둔 것 같으나, 현재 학계에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있는 ‘월지국’은 현재 충청남도 천안 일대에 위치한 마한연맹 왕국의 리더였던 ‘목지국’을 잘못 기재한 것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져 있다. 따라서 ‘월지국’이 마한시대에 이곳에 있었다는 영암군청 홈페이지는 수정할 필요가 있다.

‘내리비국’의 대국, ‘일난국’의 소국

한편 거대한 신연리 9호분 고분을 비롯하여 태간리 전방 후원분, 내동리 고분 등 현재까지 확인된 대형고분 15기 가량이 대부분 영산지중해 연안 시종지역에 분포되어 있는데, 그 지역에 커다란 규모의 정치체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반면 영암지역 대부분을 차지하는 곳에 위치한 ‘일난국’의 규모를 밝혀줄 유적들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일난국’ 연맹체가 강진 해남반도에 자리 잡았던 마한남부 연맹의 패자 ‘침미다례’와 인근 강국 ‘내비리국’ 사이에 끼어 있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큰 세력을 형성하기가 어려웠던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여하튼 영암지역에 ‘내비리국’이라는 대국과 ‘일난국’이라는 소국이 서로 경쟁 내지는 협조하면서 연맹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믿어진다. 말하자면 전자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언급된 대국이고, 후자는 소국이 아닐까 여겨진다. 이와 같이 위지 동이전의 54국 가운데 두 연맹왕국이 오늘날 영암지역에 있었다는 것은 당시 이 지역이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국을 형성하였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영암 남쪽은 월남촌, 서쪽은 구림촌으로 신라 때 이름난 촌락이다. 이 지역은 서남해가 서로 맞닿는 곳에 위치하여 신라에서 당으로 들어갈 때는 모두 이 고을 바다에서 배로 출발하였다”라고 언급한 바와 같이 영암지역은 영산지중해의 길목에 위치하여 물산의 유입 이동이 빠르다는 지리적인 이점과 다른 내륙의 평야 지대와는 달리 하천 부유물과 톼적물 유입이 증가함으로써 하상보다 높아져 조수(潮水)의 영향을 받지 않은 비옥한 노출 간석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어 다른 연맹국들 보다는 경제력이 튼튼했을 것이다.

이 같은 경제기반을 토대로 낙랑과 왜 등 이웃 국가와 활발한 교류활동은, 지난 호에서 다룬 바처럼 ‘영산강식 토기’로 대표되는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는 등 지역 연맹체의 문화 역량을 한층 높였을 것이다. 5세기 초 이 지역출신 왕인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왜에 건너가 일본의 고대 사상 형성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던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이 지역은 부강한 경제기반을 바탕으로 개방성을 갖춘 독자적 문화역량이 형성되어 있었을 법하다.

월나악과 내비리국의 관계는?

6세기에 이 지역이 백제에 편입되었을 때 ‘월나군’이라 하여 ‘군’이 설치된 것은 이 지역의 정치적 힘이 강력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고려 때 이미 ‘소금강산’이라는 별칭이 붙었던 월출산 이름이 신라 때 ‘월나악’이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인근에 있었던 ‘반나부리’의 ‘나’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월나악’ 명칭은 이미 내비리국이 있었던 마한시대부터 월출산의 명칭이었고, 여기서 군명 ‘월나악’이 백제 때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은 통일신라 시대에 ‘월나군’ 명칭이 오늘날의 ‘영암군’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어지고 있는데서 가능해진다.

월출산 ‘동석’과 ‘영암’

조선 성종 때 출판된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 월출산조에 영암인이라면 너무나 잘 아는  ‘動石’ 이야기가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최근 그 ‘동석’을 확인했다는 기사를 보았지만, 월출산 ‘동석’과 관련된 인터넷상의 기사들을 검색하고 영암출신 인사들에게 확인한 바에 의하면, 1897년에 나온 ‘호남읍지’에 실려 있다고 하는 등 동국여지승람 기록과 전승 이야기들이 혼재되어 있는 것을 느꼈다.

이에 번거롭지만 동국여지승람 ‘동석’관련 해당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면 “월출산 구정봉 밑에는 바위가 셋이 층층으로 쌓여 있는데 높이가 한 장이고, 둘레는 10여 위가 되는데 서쪽으로는 봉우리를 향하고 동쪽으로는 절벽으로 향해 있는데 1100명이 들려 해도 꼼짝 않은데, 1명이 밀면 움직인다. 아무리 절벽 밑으로 밀어내려 해도 떨어 뜨려지지 않는다 하여 ‘靈石’ 즉 신령스런 바위라 일컫는다. 군 명칭이 이에서 비롯되었다”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영암’ 이름이 ‘영석’의 ‘석’자를 같은 훈인 ‘암’으로 바꾸어진데서 유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독자적 전통이 배어 있는 ‘영암’의 명칭
그런데 영암군 명칭은 신라 경덕왕 때 ‘월나군’의 명칭을 바꾼 것이라 할 때, 이미 ‘동석’의 존재를 알고 군명을 개칭할 때 사용된 것이라 여겨진다. 경덕왕 때 추진된 행정구역 개편, 예컨대, 충북 길동군을 영동군으로 고친 것처럼 이른 바 ‘漢化<중국화, 요즘 같으면 글로벌>정책’은 전국의 모든 행정구역을 한식으로 고친 것으로 이전 지명과 상관이 있거나 ‘보성군’처럼 중국의 지역명칭을 차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월출산 ‘동석’과 연결을 지어 군명을 정한 경우는 그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이 지역의 정치세력이 백제에 편입된 후에도 토착성을 강고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말하자면 바로 이웃 ‘내비리국’은 백제에 의해 ‘반내부리’라고 명칭도 절단되고 행정단위도 ‘현’으로 축소되었다가 통일신라 때 군으로 승격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바로 이웃한 영암 쪽에 있었던 정치 세력들은 거센 파고를 슬기롭게 극복하며 세력을 유지하며, 통일신라 시대에도 ‘군’의 위세를 잃지 않고 고려 시대까지 그 위세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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