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초등학교 교실에서, 한참 바삐 애들이 책가방을 챙기고 있다. 종례만 하면 금방 집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갈 요량들이다. 그때 담임 선생님이 불쑥 숙제를 내주시는 것이다. “오늘 숙제는 간단하다. 집에 돌아가서 내일 학교에 다시 올 때까지 그동안에 있었던 일 중,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일을 내일 1교시 국어시간에 발표하기다.”

다음날 1교시에 한 아이가 용감하게 교단에 올라섰다. “선생님, 우리 어머니가 그러시는데요, 장마 때문에 채소 값이 너무 올라서 이제는 김치 해먹기가 겁난다고 걱정하셨어요. 치솟는 채소 값이 큰 문제여요.” 이어서 단에 오른 아이는 “제가 오늘 늦잠을 잤거든요, 그래서 학교에 늦을까봐 헐레벌떡 달려오다가 동네 어귀를 홱 돌자니까, 그새 새하얀 개망초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지 뭡니까. 그걸 훔쳐봐서 그랬던지 학교 오는 동안 내내 기분이 상큼하고 발걸음이 가벼웠어요.”

다음은 어느 중학교 교문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등교하는 학생들로 한참 북새통인 교문에서 그만 교통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이를 목격한 한 학생이 헐레벌떡 교실로 달려와 아침 자율학습 지도를 하고 있는 담임 선생님 앞으로 다가가서 “선생님, 선생님, 지금 교문에 큰 교통사고가 났거든요. 제 보기에 30세쯤 되는 아저씨가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데요, 어림잡아 피를 2그램은 흘러 바닥에 흥건하고요, 직경 2cm쯤 되어 보이는 살점이 두 개나 나둥그러져 있을 뿐만 아니라 허연 허벅지 뼈가 훤히 드러나 보였어요.” 뒤이어 교실로 들어온 다른 학생은 숨을 몰아쉬며 “선생님, 선생님 교문에 교통사고가 났는데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만큼 끔찍했어요.”라고 했다.

이상에서 보듯, 똑같은 숙제를 해오거나, 똑같은 사건을 목격하고도 실제적인 관심을 보이거나 사실만을 보고 하려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의 느낌이나 태도, 해석을 나타내려 하는 학생도 있다. 이런 표현 중, 실제적인 관심을 나타내거나 사실을 보고하기 위한 말이 보통 언어라면, 느낌이나 태도, 해석을 나타내는 말이 시적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시의 언어는 과학의 언어와는 대조적이다. 과학의 언어는 말의 개념표시에 주로 의존함으로 직접적, 비개인적, 논리적, 이성적, 객관적인데 반해, 시의 언어는 함축에 크게 의존함으로 매우 간접적, 개인적, 비약적, 감성적이며, 주관적이다.

달리 이야기해 보자. 사랑하는 청춘남녀가 달빛이 교교히 비치던 날 밤에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둑길을 걷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한갓 말이 필요 없다. 마냥 걷기만 하면 됐다. 하늘 끝까지라도 걸어갈 참이다. 한 번쯤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니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손 치더라도, 이 청춘남녀의 심정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한 없이 한 없이 걷다가 그래도 여자가 먼저 슬며시 말을 꺼냈다. “자기! 오늘따라 달이 유난히 밝군요.”
남자가 무뚝뚝한 말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보름달이니까 밝지.”

왜 이 청춘남녀는 동문서답을 했을까? 시의 재료는 언어다. 미술의 재료는 선과 색채고, 음악의 재료는 리듬과 가락이며 무용의 재료는 몸짓이다. 이들은 각각의 재료를 사용해서 미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똑같은 예술이지만, 감상법은 많이 다르다.

예컨대 그림이나 노래, 무용 등은 보고 듣는 순간에 ‘아! 아름답다.’라고 감탄하거나 아니면 ‘에이! 시시해.’라고 무시하는 반응이 나오지만, 시는 한참을 들여다 보고, 생각해보고 때로는 외워봐야 비로소 감동을 받든지 말든지 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선, 색채, 리듬, 가락, 몸짓 따위는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를 때, 또는 무용할 때만 사용하지, 아무데나 그림을 그리고 다닌다든지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다닌다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시의 재료인 언어는 시를 쓸 때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에 더 많이 쓰인다. 따라서 전문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시를 쉽게 접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시를 평하려 든다. 말하자면, 시를 모르는 사람들은 시어와 일상어는 똑같은 언어이지만 전혀 다름을 이해하려들지 않는다.

예컨대 자동차 부품상회에 있는 엔진은 여러 쇳덩어리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게 자동차 속에 들어가 다른 부품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면 자동차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변한다. 또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늘씬한 아가씨가 요정이나 나이트클럽에 있으면 매우 선정적으로 보이지만, 수영장에 있으면 대수롭지 않게 보인다. 이렇듯 일상어가 한 편의 시 안에 들어가면 시가 갖고 있는 요소, 일테면 리듬이나 이미지, 어조 등과 유기적으로 얽어져 시어로 형상화됨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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