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 ‘영산 지중해’를 지배한 '내비리국'(上)

시종 옥야리 고분군

맹간의 우열의 차이가 작은 마한 연맹체

우리나라 초기 모습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서인 중국 측 자료인 『삼국지』위서와 『후한서』동이전에 따르면, 마한은 모두 54개의 나라로 구성된 연맹왕국으로, 각기 12개의 나라로 구성된 진한이나 변한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54국은 3세기 후반 진수가 삼국지를 편찬하였을 때의 모습의 반영으로, 처음에는 몇 개의 연맹왕국으로 출발하여 차츰 54개 국가로까지 확대되었다가 다시 세력이 강한 연맹을 중심으로 통합되어가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일찍이 천관우 선생은 전남 지역에 54국 가운데 13국이 있었다고 추정하였고, 임영진 교수 역시 최근 고고학적인 유물을 토대로 14국 안팎의 소국이 있었다고 살폈다.

 『삼국사기』에 “마한은 서쪽에 위치하고 있고 54개 소읍이 있는데 모두 ‘國’으로 불렀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작은 소국들도 왕국을 자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삼국지』의 “대국은 1만 여 호, 소국은 수천 호, 총 10여 만 호”라고 한 기록은, 마한 연맹 국가가 적어도 단 하나의 대국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요 지역의 대국을 중심으로 소국들이 연맹하는 연합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를 Chief(군장)와 Great Chief(대군장)로 구분하기도 한다.

삼한의 왕들은 중국식 ‘왕’이라는 칭호 대신 대국은 ‘신지’, 소국은 ‘읍차’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고, “기강이 약하고 국읍(國邑)에 우두머리가 있다고 하나 읍락에 같이 살아 통제를 못한다.”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대국에 상당하는 ‘국읍’의 왕들의 권력이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평야지대가 많은 마한 연맹왕국은 인구 규모 면에서 대국, 대·소국, 소국 간에 큰 차이가 없어 인구 규모가 대국 4, 5천 여 호, 소국이 6, 7백여 호로 차이가 큰 진한이나 변한보다 정치 발전 단계가 늦은 느슨한 단계의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던 셈이다. 위서의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며 성곽이 없었다.”는 기록이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대국에 해당하는 연맹왕국 가운데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 직산 일대에 있으며 ‘마한 왕’, 또는 ‘진국(辰國) 왕’을 자처하며 마한을 대표하는 역할을 한 ‘목지국’이 주목된다. 목지국은 처음에는 백제에게 땅을 떼어 주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3세기 중엽 백제에게 병합되었다. 이때부터 백제를 비롯한 상당수 국읍, 즉 대국들 간에 연맹체 세력의 주도권과 마한의 정통성을 둘러싼 쟁탈전이 본격화되었다. 이 ‘대국’에 해당하는 연맹왕국의 하나가 시종과 반남 일대에 있었다.
 
거대한 옹관고분을 조영한 시종·반남 지역의 세력가들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영광·고창, 남으로는 해남·장흥 등에 한정되어 국지성을 띠고 있는 옹관 고분이 특히, 우리 고장 영암 시종과 인근 나주 반남 일대에 마치 경주의 대릉원이 연상될 정도로 대형 고분 수 십 기가 밀집되어 있다. 분구의 규모 또한 최대급인 경우도 많아 이곳이 당시 영산강 유역에서 가장 중심 지역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가 찾고자 하는 마한 남부 연맹의 주 세력권이 이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AD3∼4세기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되는 시종 내동리 1호분은 둘레 길이 56m, 높이 5∼8m로 연 인원 5,000명, 반남면 덕산리 3호분은 둘레 길이 45m, 높이 8m로 연 인원 5,110명이 각기 동원되어 조성되었다고 한다. 기껏 길이 20m, 높이 7.7m에 불과한 백제 무령왕릉과 비교해 보면 두 고분이 얼마나 거대한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형 고분을 축조하는데 들어가는 엄청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수장 계층이 존재해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반남 신촌리 9호분과 대안리 9호분 등에서 출토된 금동관, 금동신발, 용봉문 환두대도 등은 백제 무령왕릉 출토 유물과 비교하더라도 피장자의 정치적 위상이 절대 뒤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곳에서 세력을 형성했을 연맹왕국의 구체적인 모습을 문헌에서 확인하는 것이 쉽지 않다. 전남 지역에 마한의 54 연맹왕국 가운데 적어도 13여 왕국이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는데, 혹시 이들 연맹왕국과 시종·반남 일대의 거대한 고분군을 조영했던 정치 세력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마한 54국의 위치를 비정하였던 천관우 선생은 영암 일대에 ‘일리국(一離國)’이 있었다고 추정한 바 있다. 우리 지역의 지석묘(고인돌)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목포대 이영문 교수 역시 영암 월출산 주변, 즉 영암 덕진, 신북, 군서, 서호, 학산, 미암 등지의 지석묘 밀집지가 ‘一離國’으로 비정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영암 시종 지역과 나주 반남 지역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비정을 하지 않았다.

이병도 선생이 반남 지역을 54국 중 ‘불미국(不彌國)’으로 추정한 바 있으나 이 주장은 천관우 선생이 전북 부안이나 태인으로 비정한 이래 부정되고 있다. 정인보 선생 또한 ‘속로불사(速盧不斯)’ 왕국이 반남 지역에 있었다고 보았지만 언어적으로 전혀 연관성이 없어 따르기 어렵다.
 
시종·반남 지역에 ‘大國’이 등장하다

‘삼국사기’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반남 지역이 백제 때 ‘반내(나)부리현(半奈夫里縣)’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 주목된다. 통일신라 때 축조된 반남 평야의 낮은 언덕에 자리 잡은 자미산성 내부 건물지에서 ‘반내부(半乃夫)’라고 적혀 있는 백제 명문와(銘文瓦)가 출토된 것에서 이곳이 백제 때 ‘반나부리’라고 불리어졌음은 분명하다.

통일신라 때 경덕왕이 추진한 한화정책(漢化政策)으로 인해 비슷한 음인 반남군으로 개칭되었된 것이다. 나주를 백제 때는 발라군(發羅郡)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이 또한 ‘반나부리’와 음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반나부리’가 나주 지역을 오랫동안 대표하였던 이름이었다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반남 지역이 백제 때 ‘반내부리’라고 불리어졌던 것은 분명해진 셈이다.

 그렇다면 54국 가운데 하나인 ‘내비리국’이 반남 지역에 있었던 연맹왕국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내비리국(內卑離國)’의 ‘비리(卑離)’가 벌판을 뜻하는 벌(伐)=부리(夫里)=평야의 뜻이 있다는 육당 최남선 선생의 견해를 따를 때, ‘내(內)’는 ‘내 천(川)’의 의미이므로 ‘내비리국’은 ‘냇가가 있는 평야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지명 이름과 현재 반남 고분군이 자리 잡고 있는 반남 평야 일대를 관통하는 큰 내(川)인 삼포천를 비롯 작은 하천들이 많은 사실과 일치하고 있다. 반남 지역에는 ‘내비리국’이라는 연맹왕국이 있음이 확인된 셈이다.

 그러면 왜 백제는 ‘반내부리’라 하여 접두어격인 ‘반(半)’을 붙였을까? 그것은 백제가 ‘내비리국’을 차지한 후 ‘반쪽 냈다’는 의미를 담은 정치적 지명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한다. 백제가 섬진강 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끝까지 대립했던 대가라(大加羅)를 ‘반파(伴跛 혹은 叛波)’라고 비하하여 불렀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능한 추론이다.

이를테면 해남 반도의 강력한 또 다른 마한 왕국이었던 침미다례를 ‘남만’이라 하여 무시하였던 백제가 영산강 유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며 끝까지 백제 중심의 연맹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내비리국’을 제압한 후 절단 낸다는 의미로 ‘반쪽 낼’ ‘半’字를 붙인 것이라 생각된다. 시종·반남 일대의 거대한 고분군의 존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알려주고 있다고 믿어진다. ‘내비리국’이 영산지중해의 대국으로 마한 남부 연맹체의 핵심 왕국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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