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숨결을 찾아(2)

옛날 수많은 황포돛대가 오가고 각종 수산물이 풍부했던 덕진포구는 이제 개천으로 변했고, 잘 포장된 국도가 뚫려 예전의 흔적을 찾아볼 길이 없다.

왕건, 각종 물산이 풍부했던 곡창지대 나주와 영암을 탐내다

영암의 해상세력과 연대한 왕건 통솔력·해전술 바탕

군사적 요충지 덕진포 승리로 후삼국 통일대업 이뤄

황포돛대가 넘쳐났던 덕진포

영암사람들은 영암천을 젖줄처럼 여기며 생활했다. 1930년대 덕진포에는 황포돛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나들었다.
발동기도 없지만 바람을 이용하여 요리조리 바람을 담아 앞으로 나아갔다.
바람이 없을 때는 노를 저어가며 지루한 여정을 채우기도 했다.
특히 배날리에 있었던 정미소는 강진, 장흥 사람들이 먼 거리를 마다 않고 쌀가마 지게를 지고 찾아왔다.
이곳에서 정미된 쌀과 보리는 일본까지 수출되기도 하고, 가까운 목포에 내다 팔기도 했다.
황포돛대가 닿은 곳은 덕진포 외에도 매월리 석포, 성재포구, 해창포구, 영암 배날리 포구 등이 있었다.
이처럼 영암사람들은 수로를 통해 먼 곳까지 드나들었다.

영암사람이 나주나 한양을 가기 위해서는 덕진다리를 이용했다.
도로가 뚫리고 공용버스가 등장하자 사람들은 영암 버스터미널을 통해 광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토요일이면 고향을 찾는 학생들로, 영암터미널은 북새통을 이루었고, 일요일 오후에는 광주로 가기 위해 모여든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손에는 저마다 어머님이 싸주신 김치며, 쌀 포대가 한 가득했다.

과거 조선 사람들이 말을 타고 역리를 출발하여 덕진다리를 건넜듯이, 70~80년대 영암 청소년들은 역리 인근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포장도로가 난 덕진다리를 지나갔다.

천혜의 요새 덕진포를 장악하라

918년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일찍이 나주와 영암의 풍요로운 자연환경에 매력을 느꼈다.
바다와 이어지는 이곳에는 귀한 소금이 나오고, 연안에 가득 널려있는 갯벌에서는 각종 수산물이 풍부했으며, 너른 평야에서는 질 좋은 미곡이 생산되었다.
이러한 풍요로운 자연조건을 바탕으로 철기시대 마한 세력은 이곳에서 수백 년 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뱃사람 못지않게 배를 능숙하게 다루면서 바다 건너 먼 곳까지 진출했다.
덕진 사람들은 장보고의 오른팔 장수였던 정년 장군이 덕진포에서 5리 정도 떨어진 선암마을에서 태어났다고 믿는다.
그래서 선암마을은 무장골이라고도 불린다. 846년 장보고가 사망하고 그를 추종하던 장수들이 대부분 송악(개성) 인근 정주해안으로 옮겨 활동한 반면, 정년 장군은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하고 인근지역은 물론 완도에 이르는 지역의 해상 호족들을 관리했다고 전한다.
그 옛날 덕진포까지 깊게 들어오던 바닷물은 해상인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해주었다.

왕건은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성하기 위한 큰 그림을 그렸다.
그는 903년 수군을 이끌고 서남해안으로 진출한다.
송악출신 왕건은 그곳에서 청해진에서 활동했던 장수의 후손들과 친분을 쌓고 연이어 영암의 해상세력과 연줄을 잡았다.
그는 집안에 내려온 도선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영암 상대포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을 터이다. 후백제의 견훤은 이 지역을 명목상 지배하고 있었으나 토착 성주를 확실하게 포용하지 못했고, 강력한 연대의식을 가진 해상인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했다.
왕건은 서남해에서 활동하던 해상인의 지원에 힘입어 이 지역 10개 군현과 연대하고, 금성을 점령하여 병력을 상주시키고 지명을 나주로 개칭한다.

왕건은 909년 2차 출병하여 무안군 해제면에서 견훤의 배를 빼앗고, 신안군과 진도군을 차지한다.
서남해 섬지역을 차지한 왕건은 내륙으로 눈을 돌린다.
나주와 영암은 넓은 평야로 이루어진 반면 해로가 발달하여 접근이 용이하다.
그 중 영암의 덕진포는 사통팔달로 통하는 육로의 정점이며 해남군과 강진군으로 드나드는 길목이었다.

왕건은 3천여 수군병력을 동원하여 견훤이 막고 있던 군사적 요충지 덕진포로 향했다.
덕진포를 차지하면 그 주변은 물론 강진, 장흥, 해남군이 수중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견훤의 군대가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는 수로 곳곳에 배를 숨기고, 중요한 길목마다 군사를 숨겨놓고 수륙 협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왕건 덕진포 해전에서 승리하다

912년 여름, 밀물이 들기 시작하고 바람 방향이 바다에서 육지로 부는 된 갯바람을 타고 왕건의 수군은 덕진포를 향해 출발했다.
덕진포구를 향해 은밀히 항해하던 왕건의 수군은 영암천에 이르러 진을 짜고 기다리던 견훤의 공격을 받는다.
왕건은 공포에 질린 부하들을 독려하며 승리는 강한 의지와 단결력에 있다며 스스로 앞장서 싸웠다.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하여 불화살을 날리니 견훤의 군대는 불길에 싸여 혼비백산한다. 수천발의 화살이 하늘을 날고, 수백 척의 전함이 불에 타 올랐다.
죽지 않은 자는 도망가기 바빴다.
견훤은 구사일생으로 부하 몇 명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덕진포 해전의 승리는 왕건의 지휘 통솔력, 함선 운용술, 물때와 바람방향을 응용한 해전술, 그리고 지역토착 해상세력의 지원을 통해 얻어졌다.
덕진포 해전의 승리로 왕건은 과거 장보고가 차지했던 서남해 연안의 제해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신북 마산과 월평리 여석산

왕건은 해전 승리의 기세를 몰아 병선을 덕진에서 서호, 목포에서 몽탄에 이르는 요충지에 배치하고, 자신은 신북면 마산에 진지를 구축한다.
마산은 덕진포에서 20리 거리이며, 견훤이 흩어진 병사를 모아 은거하고 있던 반남면 자미산성으로부터 또한 20리 거리에 있다.
왕건과 견훤 군사는 마산과 자미산성 사이에 있는 신북면 월평리를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덕진포에서 신북으로 향하다 보면 우측으로 마산이 보이고 그 아래 작은 방죽이 나온다.
이곳은 군사들이 말에게 물을 먹이는 곳으로 말물통이라 불렸다.
수백 년 세월동안 덕진다리를 건너 이곳을 지나던 길손들도 말에게 물을 먹이고 쉬어 갔다.
마산 아래 박굴이라는 곳은 옛날 군사들이 훈련했던 곳이라 전해진다.
이곳에서 좀더 올라가면 옛날 원님이 지나다가 쉬었다 갔다는 원등이 나온다.

왕건이 주둔했던 마산으로부터 북쪽으로 1㎞ 정도 가다보면 신북면 소재지가 나오고, 소재지 약간 지나 좌측에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숫돌이 나온다하여 숫돌뫼 또는 여석산(礪石山)이라 부른다.
왕건의 군대가 이곳에서 생산된 숫돌로 칼을 갈아 견훤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왕건에 대한 전설로 인해 이곳의 숫돌은 유명세를 탔고, 어찌나 많은 숫돌을 파냈던지 커다란 웅덩이가 생겼고, 그 깊이가 명주실 한 소쿠리가 다 들어갈 정도로 깊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 깊이가 중국까지 통했다고 말한다.

여석산을 중심으로 왕건과 견훤은 밀고 당기는 싸움을 계속했다.
여석산 쌍패놀이는 당시 치열한 전투의 모습을 농악으로 재현한 것이라 전해진다.
여석산 쌍패놀이는 탐색, 진군, 접전, 화해로 통하는 구성을 통해 전쟁의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다.
적장의 목을 따기 위한 군사적 전술을 농악에 이용한 것은 호남 우도농악의 특징이기도 하다. 실제 전쟁에서는 왕건과 견훤이 장소를 바꿔가며 10여 년의 지루한 싸움을 주고받는다.

<영암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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