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 신라시대 태평성대가 이어지던 시절에 영암고을 원님이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 했다.
염라대왕 앞에 선 원님은 기회가 된다면 그간 하지 못한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싶다고 간청했다.
염라대왕은 젊은 원님에게 목숨 회생의 기회를 준다.
그런데 저승사자는 이승에 데려다 주는 조건으로 삼백 냥이라는 큰 돈을 요구한다.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이 없습니다” 원님은 말했다.
“저승에는 덕을 쌓은 만큼 채워지는 곳간이 있으니 그곳에서 가져와라” 저승사자는 명령했다.
원님이 자신의 저승 곳간에 가보았으나 그곳에는 달랑 볏짚 한 단만 놓여 있었다.
자신이 살아생전 남을 위해 건네 준 유일한 볏짚이었다.
저승사자는 난감한 처지에 놓인 원님에게 이웃동네 덕진 아씨의 곳간에서 빌려서 내고 나중에 갚으라고 했다.
덕진 아씨는 평소 실천한 덕이 많아 저승 곳간 가득 재물이 쌓여 있었다.
원님은 그곳에서 삼백 냥을 빌려 저승사자에게 주고 이승으로 회생할 수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원님이 살아나자 장사 지내던 사람들은 혼비백산 했다.
원님은 깨어나자마자 이웃동네 덕진 아씨에 대해 물었다.
주변 사람들은 덕진 아씨의 착한 행실에 대해 입을 모아 칭찬했다. 덕진 아씨는 배고픈 사람에게 양껏 음식을 퍼주고, 잘 곳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랫목을 내주며, 아픈 사람은 치료해주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기도 하고, 돈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노잣돈을 나누어 준다고 했다.
그녀는 영암에서 나주로 가는 길목, 영암천 옆에서 작은 주막을 차려 살고 있었다.
그곳은 서해안에서 바닷길로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끝 지점으로 목포에서 들어오는 배가 마지막으로 정박하는 나루터가 있는 곳이다.
이곳으로 이어지는 영암천은 폭이 백자 남짓으로 나무다리를 건너야 나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바닷물이 차오를 때는 나무다리를 건너가기가 위험했으며, 물살에 다리가 무너져 내린 경우가 허다했다.
이럴 때면 영암천 상류 누릿재까지 한나절을 돌아가야 했다.
원님은 덕진 아씨에게 자기가 죽어서 황천을 건너 염라대왕을 만났던 이야기와 저승곳간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그간 가난하게 살면서도 남을 위해 헌신한 만큼 저승곳간에 쌓여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원님의 태도는 심각했고, 자신의 채무를 갚게 해달라고 애원하다시피 삼백 냥을 건네주었다. 커다란 기와집도 지을 만한 금액을 받아 든 덕진 아씨는 저승으로부터 온 선물의 용처를 알고 있었다.
덕진 아씨는 그간 영암천을 건너는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불편함을 보면서 튼튼한 다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그녀는 그 길로 유명한 석공을 수소문해서 영암천을 가로지르는 튼튼한 돌다리를 놓도록 했다.
다리 한 가운데에는 작은 배가 지나갈 수 있는 커다란 반달모양이 있고, 강한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난간으로 장식한 무지개다리가 놓였다.
사람들은 예쁜 다리가 완성되자 이 다리를 덕진지교(德津之橋 덕진의 다리)라 하여 칭송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덕진(德津)에는 물이 얕아도 다리가 아직 있고/도갑(道岬)에는 비석이 남았는데 글씨가 반은 없구나.”라고 노래했다.
이에 따르면 덕진이라는 명칭이 조선 초기에 지명으로 사용되었고, 그곳의 다리는 지역을 대표하는 명성을 얻은 것으로 이해된다.
1834년에 중건된 ‘제주목사조공정철속환양인선정비’에는 ‘靈巖德津橋居000重建’라는 명문이 있다.
이는 당시 ‘덕진교(德津橋)’가 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덕진 아씨의 주막이 있었던 곳에는 현재 ‘대석교창주덕진지비(大石橋創主德津之碑, 큰 돌다리를 만든 덕진의 비)’가 서 있다.
이것은 1832년 마을사람들이 덕진 아씨의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 아래 넓은 터에는 덕진제각이 있고, 이곳에서는 올해도 지난 5월30일 단오에 덕진 아씨를 기리는 ‘대석교창주 덕진여사 추모제’가 진행되었다.
<제공=영암문화원>

어릴 적, 닭 한 마리 잡을 때면 어머니는 커다란 가마솥에 하얀 쌀죽을 가득 끓여 그릇 넘치게 담은 닭죽을 내 손에 쥐어주며 집집마다 나눠주셨다.
나보다 남의 배고픔을 먼저 염려하고, 내 밥그릇 내주는 문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덕진면 사람들은 매년 단오날에 ‘대석교창주 덕진여사 추모제’를 모신다. 대갓집 제사가 이보다 엄숙할까.
덕진면 사람들은 정성을 다해 음식을 차리고 엄숙하게 제를 올린다.
그들 마음속에 덕진여사는 자신의 큰 재산을 기부하여 이웃을 위해 돌다리를 만들어준 실존인물로 받아들인다.
언제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덕진여사 이야기는 조상대대로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구전설화가 그렇듯 말하는 사람마다 약간씩 그 내용이 다르다.
수백 년 이어져 오는 동안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느 것이 정설이고, 어느 것이 역사적 진실인가의 여부는 부질없다.
설화란 그저 그렇게 믿고자 하는 사람에 의해 의미가 생성된다.
본지는 영암문화원과 함께 영암의 숨결을 찾아 여행에 나서고자 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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