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희 서

시골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어렸을 적 ‘장날’ 에 대한 추억은 한 두 개쯤 가지고 있으리라. 그것은 추석이나 설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명절에 입을 옷가지를 어머니가 장날에 가서 사다 주셨고 집에서는 구경 못하는 여러 과자들을 사다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꼽아 기다려지는 것은 ‘장날’이기도 했다.
 나 또한 ‘독천 장날’에 대한 특별한 추억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를 따라 소 끌고 장엘 갔다가 아버지께서 “사탕 사먹으라”며 주신 용돈을 가지고 “무얼 살까?” 온 장마당을 뒤지다가 땅바닥에 펼쳐 놓고 파는 ‘作文法’이라는 책을 샀다.
내 기억으론 아버지께서 주신 생애 최초의 용돈으로 기억이 되는데 어린 나이에 먹고 싶은 사탕을 안사고 책을 샀다는 것 자체가 지금 생각해도 기특했다.
초등학교 4∼5학년 때 쯤으로 기억이 되는데 학교를 다니는 내내 “나는 왜 이리 가난한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가? 중학교는 가고 싶은데 나는 왜 그런 넉넉한 가정에서 살지 못하는가?”에 대한 회의(懷疑)로, 요즘으로 말하면 사회 양극화에 대한 불만, 즉 ‘흙수저’ 론에 대한 불평으로 가득 차 그런 불만을 글로 마음껏 써서 세상에 고발하고 싶은 강한 욕망이 있었다.
그래서 장마당에서 사탕 대신에 집어든 것이 먼지 수북이 쌓인 글짓기 책이었던 듯하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문을 닫은 지 이미 오래다.
졸업할 때 또래에서 중학교 가는 애들이 없었고 전남도 교육청이 근무하는 선생님들에게 벽ㆍ오지 점수를 줬으니 학교 규모가 어떠했겠는가는 뻔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4학년 형들과 한 교실에서 공부했다. 4학년 공부시간에 선생님의 질문에 내 생각을 말 했다가 형들한테 혼쭐이 나기도 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나는 다듬어지지 못한 좀 엉뚱한 데가 있었다.
스스로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었고 그런 다듬어지지 못했었던 생각들이 사회 양극화 현실에서의 가난한 현실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우는 쪽으로 갔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직책과 관련해 살아왔다.
신문기자, 제2사회부장, 사회부장(2회), 교열부장, 편집부국장, 판매국장, 논설위원, 주필, 신문사 발행인 겸 사장, 사립 중ㆍ고등학교 서무과장-. 아니 또 있다.
전석홍 전라남도 지사님이 앉혀주신 대한 나(癩)관리협회 전남지부 사무국장이라는 자리에서도 일을 해봤다.
이러한 직책들 가운데 보람을 가지며 성취감을 가졌던 자리는 어딜까? 그건 신문사 주필이다. 사주(社主)의 강제 폐간으로 사원들이 주주가 되어 우리사주로 새롭게 출발한 무등일보에서 이미 은퇴하고 집에서 쉬는 나를 불러내 ‘발행인 겸 사장’ 자리에 앉아달라는 후배들의 간곡한 요구에 ‘1년만’ 이라는 전제를 달고 수락해 약속한 기한이 되어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상임고문 겸 주필’이라는 자리로 내려 않았다.
사장에서 내려앉은 다음 날 아침 나는 ‘주필’이라는 그 벅찬(?) 이름에 사무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파란 하늘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박희서! 너 출세했다.-” 
그것은 아마도 가슴 깊이에서 솟구치는 ‘독천 장날’ 의 꿈에 대한 성취감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주필’이라는 자리에 눈독을 들인 것은 고등학교 때로 기억이 된다. 당시 목포고등학교에는 문학동인지로 활동하는 동아리가 여럿 있어서 ‘풀잎’이라는 문학동인지에 들어가 선배들을 열심히 따라 다녔다.
글 실력도 없으면서 선배들을 따라 다니며 배웠다.
당시 목포에는 우리나라 문학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사람들이 많아 그런 분들을 모셔다가 늘 문학에 대한 특강을 들었는데 그런 분들은 글을 잘 쓰려면 신문의 사설을 많이 읽어보라 했고 그런 글 쓰는 이들의 꽃은 신문사 ‘주필’이라 했다.
그 때부터 난 오지도 않는 미래의 ‘주필’에 대한 꿈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무등일보 사회부장 때 독천 '장날’의 향수를 더듬어보는 의미로 시골 5일장에 기획물을 연재해보라 했다.
“‘시골 장’ 되살릴 길은 없는가?”라는 내용으로 기획물을 쓰도록 하고 ‘독천 장’은 글을 잘 쓰는 기자를 불러 쇠장이 유명했었던 독천(犢川)장의 유래 등을 설명해서 보냈다.
결과는 별로였다.
문수포에서 오던 낙지와 숭어 등이 끊기고 영산강이 막혀 감치 포구로 드나들던 장어, 가오리 등이 들어오질 않아 예전같지 않았다.
어렸을 적 우리 귀에 익숙했던 쇠장의 “어시 새끼 암소 임재!”하던 소거간꾼들의 목쉰 소리도 없었다.
쇠장의 쇠락과 함께  그 유명한 독천장은 이제 우리 곁을 떠난 것인가?

학산면 매월리
전 한국일보 기자 
5·18광주민중항쟁 관련 강제해직 (민주유공자 포상)
전 무등일보 주필 발행인 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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