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적산 마실길
학파동마을 2
일본 기사들의 부정적 평가에도 간척사업 완공
미암 춘동리, 해남 계곡, 영암 간척사업에 매진

현준호가 서호면 성재리와 군서면 양장리에 1.2km 제방을 쌓아 조성한 간척지 모습. 군서 모정마을에서 바라본 모습인데 들 건너 학파동마을이 보인다. 사람들은 이곳을 학파농장이라고 불렀다.

백암동, 신기동, 서호동, 학파동, 남하동, 무송동 등 이름이 동자로 끝나는 마을들은 현준호 일가의 군서면과 서호면 일대의 간척사업 때문에 생긴 마을들이다. 이곳 농민들은 20세기 말까지 이 간척지를 ‘학파농장’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들녘은 학파농장에서 간척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서호강과 인접한 마을에 사는 주민들치고 학파농장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히 몽해리, 엄길리부터 성재리에 이르기까지 은적산 자락에 분포되어 있는 마을들은 현기봉ㆍ현준호ㆍ현영원 일가와 학파농장을 말하지 않고서는 20세기 후반기의 농경 생활을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영향을 받았다.

필자는 학파농장의 탄생 배경과 성장 과정을 자세히 알기 위해 오미일 교수가 쓴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이라는 책을 참고하였다

. 아래 내용은 이 책에서 학파농장과 관련된 내용을 그대로 발췌했음을 밝힌다.

현준호의 학파농장 설립
현준호 집안은 그의 증조부 때 조선왕조 말기 혼란한 정세 속에 충청도 천안으로부터 전남 영암 학계리로 이주했다.

부친 현기봉은 칼날이란 별명을 들을 정도로 일 처리에 빈틈이 없어, 조부 현린묵이 남겨 놓은 3천섬 농지를 두 배가 넘는 7천 섬으로 증가시킬 정도로 이재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현기봉은 한말 호남지방에서 의병운동이 격화되면서 종종 지주들이 공격 대상이 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1908년 치안상태가 나은 목포로 이주했다.

개항장 목포에서 현기봉은 광주농공은행 이사를 비롯하여 목포창고금융(주) 사장, 해동물산(주) 사장, 조선생명보험(주) 이사, 朝日石鹼(주) 감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근대 금융과 산업 경제에 눈을 떴다.

현준호는 1919년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후 호남은행 설립 준비에 나섰다. 1920년 8월 은행 창립이후 전무, 1925년 1월 이후 대표이사로 일했다.

그가 은행에 주력하면서 1922년 무렵 광주 부동정(이후 호남동으로 개칭)에 새 터전을 잡고 1924년 완전히 이주했다.

1942년 4월 동일은행에 흡수 합병되기까지 현준호의 경제활동은 ‘호남은행장’의 그것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실제 현준호의 물적 토대와 그에 기초한 경제활동을 고찰하는 데에 중요한 또 하나의 축은 바로 학파농장이다.

학파농장은 1924년 7월 현기봉이 사망하자 현준호가 모든 재산을 물려받으면서 현기봉의 호를 따서 곧바로 건립했다.

이후 1934년 5월 합명회사 형태로 법인화하여 광주지방법원에 회사 설립등기를 접수하고, 7월 1일 정식으로 합명회사로 전환했다. 기존의 농업경영을 법인 형태로 전환했던 것이다.

대표사원은 현준호와 그의 계모인 곽순경이었는데, 실제 현준호가 모든 업무를 주관했다. 합명회사 학파농장의 업무는 ①토지의 개량, 개간, 일반농사, 조림 ②공사채주식ㆍ토지ㆍ가옥의 취득 및 매매와 임대차 ③창고업 ④앞의 각 업무에 관련된 일체의 부대사업이었다.

즉 학파농장은 현준호의 주요 자산인 토지와 유가증권의 관리와 투자, 토지 간척과 개량을 주요 영업내용으로 했다.
 
학파농장의 간척사업
학파농장 경영에서 간척을 통한 농지 확대는 중요한 사업부문이었다. 학파농장은 합명회사로 개편하기 이전인 1932~1933년의 영암군 미암면 춘동리ㆍ호포리 매립, 그리고 1935년 영암군 미암면 신포리, 1936~1938년 해남군 계곡면, 1940년 영암군 군서면과 서호면 등의 매립공사를 행했다.

통감부 시기에는 갯벌, 소택지(沼澤地) 등의 매립이 국유미간지이용법에 의해 규정되었다. 간척이 성공하면 그 토지를 불하받을 수 있었고, 준공 다음해부터 5년 동안은 도내 최열등지(最劣等地) 지세의 3분의 1만 납부해도 되는 감면혜택이 주어졌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공유수면매립입법(1921년 4월 법률 제57호)에 의거하여, 1923년 3월 제령 제4호 공유수면매립령을 공포하고 1924년 8월부터 시행했다. 이에 따라 간사, 소택지와 같은 공유수면의 간척은 매립으로 간주, 시행되었다.

이 공유수면매립령에 의하면 조선총독은 공사의 착수 및 준공기간을 지정하였으며, 매립권의 양도도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매립공사가 완료되어 준공인가를 받게 되면 매립지의 소유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1940년 간척사업 착수
학파농장은 1939년 11월 군서면 양장리ㆍ모정리ㆍ서구림리, 서호면 소산리ㆍ쌍풍리ㆍ엄길리ㆍ몽해리 공유수면매립면허를 신청했다.

이곳은 영암군의 중앙인 군서면과 서호면의 경계에 만입된 간사지였다. 이곳 토질은 화강암과 충적토로 이루어져 다량의 비료 성분을 함유하여 벼농사에 가장 적합하므로 이전에도 이 지역의 매립권을 허가받은 자가 있었으나, 사업이 지지부진하여 8, 9년 후 마침내 면허권이 실효되고 말았다.

현준호는 첨부한 ‘출원이유 및 지급시공(至急施工)을 요하는 사유서’에서 본 사업을 가장 경제적으로 신속하게 수행하여 부근 농촌을 구제하겠다는 결의를 진술하고 또한 사업의 완수 시 농촌 진흥을 꾀하고 모범농촌을 건설하여 불후의 사업을 남기려고 한다며 ‘향토애의 정신’을 강조했다.

<사업계획 설명서>에 의하면 매립면적은 총 265만 1,319평(883정 7반 9묘 9보)이고 이 중 개답면적은 188만 1천 평(627정보)이었다. 공사는 3기로 나누어 수행하도록 계획되었는데, 1기에는 면허일로부터 1년 6개월 내에 방조제방ㆍ배수갑문 등 제방공사 일체, 2기에는 2년 6개월 내에 저수지ㆍ배수간선공사, 3기에는 용수로 및 배수로 공사ㆍ경지 정리를 행하여 공사기간을 총 5년으로 예정했다.

<사업수지예산서>에 따르면 총 공사비 992,350원 중 1기의 방조제 공사비 317,100원은 자기자금만으로 충당하고, 제2, 제3기 사업비 65만 2천9백 원은 산미증식계획이 부활된다면, 그 50%인 32만 6천 4백 50원의 국고보조금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산미증식계획이 부활하지 않아 국고보조금의 예상이 달라질 경우에 대한 자금조달도 강구되어야만 했다.

마침내 간척사업 완공하다
학파농장은 1940년 4월 9일 부로 매립면허권을 총독부로부터 처분 받고 본격적으로 간척사업에 나섰다.

먼저 영암군 서호면 성재리와 군서면 양장리 사이의 1.2㎞ 갯벌을 막는 제방공사에 나섰다. 병의 모가지 부분인 이곳만 막으면 직선길이 6㎞, 총면적 9백 정보의 간척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 기사들의 측량 결과 당시 기술로서는 제방 길이가 너무 길고 지반이 무르다는 점, 특히 결정적으로 썰물 때 유속이 공사를 진행하기에 너무 빨라 성공률이 희박하다는 평가였다.

영산강 하류 각지에서 돌과 흙을 운반하여 강물을 막았으나 빠른 강물에 휩쓸려 내려가 공사는 순조롭지 못했다. 원래 면허를 받을 당시 준공기간은 1944년 12월 31일까지로 예정했으나 이후 사업은 난항을 겪었다.

결국 1기 방조제 공사를 끝내고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하다가 1944년 7월 초 2,802,540평의 매립권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양도하고 말았다. 해방 후 현준호의 삼남 현영원이 간척공사에 재착수하여 6억8천3백여만 원을 투여하여 완공, 1962년 10월 26일 농림부로부터 준공인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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